눈물이 난다. 살아 있는 자들이 너무나 고맙다.
눈물이 난다. 너무 많이 울어서 이제 마른 줄 알았는데, 여전히 눈물이 난다.
지인의 아들이 실종되어서, 거기 차가운 바닷 속에서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아이들이 내 자식 같아서 구조되길 바라며 울었고, 정부의 거짓말과 늦장대처에 울분이 나서 눈물이 났다. 도저히 이해불가한 의문점들이 계속 드러나는데도 왜 ? 무엇을 숨기려고 하는 것일까 ? 의혹과 울분만 쌓인다.
이제 10일째.
16일 당일 갑판까지 나온 사람들을 빼고 선실에 갇힌 단 한명도 구조되지 못했다. 현 대통령부터 책임회피에 급급한 것은 세월호 선장의 모습을 빼닮았다. 여기저기서 터지는 총체적 부실과 부패와 안일 속에 이 나라가 침몰해가도 선장이 없다는 사실이 뼈 속 깊은 통탄과 슬픔이 일었다.
생존가능성이 희박해서 시체라도 수색하려는 가족들의 울부짖음에 실종자가족의 아픔 때문에 울었다. 9일 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한 다리, 두 다리만 건너도 이곳 이웃 동네에서는 지인의 자녀와 가족이었다. 서로 삼삼오오 모이기만하면 혀를 차며 눈물을 글썽였다. 슬픔과 울분에 가득차서 세월호 참사를 이끌어낸 각 영역의 책임자를 불러 내가 알고 있는 쌍욕을 다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아직도 실종자 가족들은 팽목항을 바라보며 울부짖고 있다. 시체라도 찾는 것이 고마울 지경이라고 한다. 동료들, 아이들, 아줌마들, 아저씨들, 청소년들, 노인들....중에 국가적인 참사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공감능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했었다. 활짝 웃는 누군가를 보면 되려 미워지려고 했다.
그런데 어제 길을 걷다가 내게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다.
사람들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다시 눈물이 났다. 그것은 울부짖음도 슬픔도 아니었다.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었다. 나는 마음 속으로 계속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고마워했다.
“살아 있어서 고맙습니다. 그대들이라도 살아 움직이고 있네요. 그대들은 그 소중한 생명을 갖고 활발히 움직이고 있네요.”
내 눈은 찬찬히 살아 움직이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념과 종교가 다르고, 공감능력이 달라도 그들이 살아 있다는 것이 어찌 이리도 아름답게 느껴지고 내 가슴에 벅찬 감사가 넘치는가 ! 즐겁게 뛰노는 아이를 덥썩 안아서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졌다.
예슈아께서도 사람들을 이렇게 바라 보셨을까 ? 그들의 생명을 살리고 싶어서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것일까 ?
요일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세상은 절망을 주는 데 살아 있는 이들이 내게 또 다시 희망의 손짓을 한다.
그 희망이 또 다시 나를 속일지라도 나는 그 희망을 바라본다.
실종자구조와 사망자 수색이 끝난 뒤에 살아있는 자들이 냉정하고 지혜롭게 조목조목 책임을 묻고 처벌을 할 것이다. 그리고 부실했던 모든 영역에 대해 제대로 세워갈 것이다. 의혹들도 파헤치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살아있는 우리의 몫이다.
세월호 사망자 가족들과 실종자 가족들에게 내가 어찌 위로를 보낼 수 있을까 ? 낼 힘도 없는데 어찌 계속 힘내라고 말할 수 있을까 ?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내 탓입니다. 저도 웁니다. 그러나 당신들이라도 살아 있어서 고맙습니다.”
2014. 4. 25 금요일. 하늘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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