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다리사색

최제우 선생의 용담정을 다녀와서

00하늘다리 2007. 3. 21. 22:36

지난 3월21일(화) 동학의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 선생이 득도했던 용담정과 생가가 있던 가묘를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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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성 원장님의 친절한 안내로 우리는 수운 최제우 선생님의 일생과 3.1만세운동의 배경에 관한 이야기들을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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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성 원장>

 

저는 천도교와 인연이 좀 있습니다. 

해월 최시형 신사의 사상을 생태여성신학에서 조명하는 것을 석사 논문주제로 정하고 1년 남짓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개인사정으로 논문마무리를 못한 것이 아쉽지만, 기회가 되면 논문을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이미 9년이란 세월이 흘러 다시 천도교의 시발점인 용담정에 와서 수운선생의 삶과 도에 대한 말씀들을 들으니,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용담정에 가는 길에 길을 잘못들어 1시간 정도 지연되는 바람에, 수련방법 등에 대해 제대로 들을 수도 없었던이 너무나 아쉬웠습니다.

수운 선생은 구한말, 민족의 어려운 시기에 백성을 구하고자 도의 길을 걸었고 그의 사상은 한반도를 뒤흔들어 봉건세계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의 시초석을 놓은 점에서 수운 선생과 동학은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한 민족의 긍지요, 자존심이지요.

 

저는 이 용담정에서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19세기 제국주의의 열강 속에 암울했던 한민족에게 수운 선생을 통해 길을 제시하고, 민초들에게 희망을 주었던 것 또한 이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느껴집니다.

하나님께선 선교사의 등에 업혀서 한반도에 처음 들어온 것이 아니라, 그 전에도, 그 전 전에도, 이 민족과 함께 하였음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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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 선생님의 초상화입니다. 사진이 이상하게 나왔지요 ? 유리가 반사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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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 선생님의 사상과 체험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논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오늘은 간략소개와 사진만...

 

아래 사진은 수운선생이 득도한 곳으로 지금은 집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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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찍은 용담정>

 

 

이 사진은 ...수운선생의 가묘에서 수운선생의 진짜묘를 바라보며 찍은 사진입니다.

전기줄 사이로 하얀 비석이 보이지요? 바로 거기입니다.^^

 

 

수운 최제우(1824-1864)의 일생

 

1824.10.28 일생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에서 산림처사로 영남일대에 문명높은 가난한 선비 최옥과 재가녀인 한씨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과 재가녀의 아들이라는 출신성분으로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내다가 일찍이 어지러운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높은 뜻을 지니고 ,세상의 많은 가르침을 얻고자 천하를 돌아다녔다. 

그 당시 조선이 믿었던 중국은 영국과 아편전쟁에서 패하고, 일본은 호시탐탐 조선의 땅을 노리며, 서방세계는 제국주의적 문호개방을 요구했다.

조정은 부패했고, 백성들은 굶주림과 학정으로 시달릴 때였다.

수운선생은 세상의 많은 가르침을 만나보았지만, 궁극적으로 이러한 가르침들은 세상의 어지러움을 구할 수 있는 진정한 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봄날 1855년 어떤 여인으로부터 天書를 받았는데 거기에는 "하늘에 기도하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이후 수운선생은 세상을 떠돌며 세상을 구할 도를 찾으러 다니는 것을 그치고 하늘에 기도하기 시작한다. 이후 양산 천성산, 내원암, 적멸굴 등지에서수행을 하였고, 경주로 돌아와 구미산에 위치한 용담정에 돌아와 기도하던 중 한울님으로부터 무극대도를 받게되는 결정적인 종교적 체험을 하게 된다. 이 때가 1860년 4월5일이다. 수운선생은 득도후 1년을 수행하다가 제2년에서야 비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기 시작했다.

 

양반도 천민도 없이 모든 사람은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므로, 세상의 모든 사람은 근원적으로 모두 평등하다는 侍天主의 가르침은 당시 새로운 삶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용담정은 수운의 가르침을 받기위한 사람들로 북적되었고, 세인들의 주목을 받자 인근 유생들과 관청의 탄압으로 은적암으로 피신하게 된다. 은적암에서 [논학문],[권학가],[도수사] 등을 저술하였다.

다시 경주 용담정으로 돌아온 수운선생은 지속되는 관의 탄압으로 득도한지 4년인 1863년 12월10일에 체포되어 수감되었다가 1864년 3월 10일 대구 장대에서 左道亂正의 죄명으로 참형을 당하였다.

제자들이 그를 빼내려고 했으나 그는 도와 천명을 지키기위해  순순히 오라를 받고,  형장에 올라가 41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무수한 동학교도들의 순교의 피가 흐르고 해월 최시형 선생이 그 뒤를 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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