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막은 어디인가 ?
모래산맥일까 ? 바위산맥일까 ? 저런 것을 무엇이라고 말하지 ?
문득 졸다가 깨어보니 비행기 창문 아래로 펼쳐진 낯선 광경을
나는 어슬픈 지식으로 더듬어 규정해보려고 했다.
인공적인 것은 흔적도 보이지 않는 저 아래.....
설사 있었다고 해도, 전혀 개의치 않는 자연의 도도한 모습.
똑같은 풍경에 질식할듯이,마치 이 풍경 안에 한 티끌로 존재하는 듯,
스쳐지나가는 구름보다 한없이 작은 나.
그렇게 두바이까지 와서 환승하기를 4시간 가량 지체하고 다시 카이로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나는 또 이들 앞에 點처럼 지나간다.
"원 달러 !"
마실 물도, 작은 친절도, 화장실도, 사진 한장도 "원 달러"다.
이집트에서 휘발유1L에 200원이면, 물은 1L에 700원이다.
물이 귀한 사막에서 물은 휘발유보다 비싸다.
사실 그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
더운 지방에서 휘발유는 없어도 살 수 있을지 모르나, 물이 없으면 죽는다.
인간은 휘발유를 모르고도 오랜 세월을 잘 살았다. 그러나, 물은 생사의 갈림을 만든다.
바닷물은 많이 있으나, 그 많은 물 중에서도 생수가 필요하다 !
말 그대로 살리는 물, 인간을 살 수 있게 하는 생수 !
사막,메마름,광야,먼지......물, 생수, 오아시스........
인간의 흔적이란 버스가 달리고 있는 이 도로와 가끔씩 오아시스에 건설된 리조트들...
이 도로조차도 바람이 심하게 불면, 흔적도 없이 모래로 덮혀 버리는 것이 사막이란 곳이다.
사막의 교부가 기거했던 수도원과 모세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던 흔적을 좇아
이집트에서 출발하여 시나이반도를 지나면서
광할한 저 광야(사막을 포함하여)에 나는 점차 매료되기 시작했다.
지평선에서 황무지같은 광야와 하늘이 만나는, 인간의 흔적이 티끌 같은 이 곳에서,
밤이면 쏟아질듯이 총총 빛나는 별빛을 보면서 인간이 창조주를 찬양하는 것은 당연한 순리였을 것이다.
어찌하여 기독교 첫 은수자( St.안토니)탄생이 이집트 사막에서 시작되었는지 이해되어지기 시작한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성령에 이끌리어 먼저 광야로 가지 않았던가.
거기서 그는 사탄에게 시험을 당하고, 자신이 가야할 길을 ! 그 길을 어떻게 갈 것인가 ? 를 확인하지 않았던가 ?
어둠은 빛을 더욱 밝게 할 뿐, 빛을 이길 수 없다.
오히려 빛이 비취면 어둠은 형상에 입체감을 주는 축복의 선물이다 !
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길을,
권력이 아니라 겸손의 길을,
인기와 영예가 아니라 희생의 길을을 택한 예수.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갔듯이 나 또한 여행할 처지가 아닌데도,
내적 강한 부담감에 이끌려 머나먼 땅, 한국시각보다 7시간 뒤의 시차가 있는 이 곳 광활한 땅에 와 있는 것이다.
안토니(AD 250-356)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마태19:21)"
이 말씀을 자기에게 주신 말씀으로 느끼고 부잣집 아들로서의 부귀를 버리고
가난의 삶과 고독한 사막의 은수자의 길을 간다.
그는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고독하였지만, 그의 영혼은 고독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진정한 친구가 있었으니 바로 그가 사랑하던 하나님을
거기서 더 가까이 만나뵙고 사랑을 나눌수 있었기 때문이다.
안토니가 고독한 가운데 기도 중에 발견했던 샘은 1700 년 가량이 지난 아직도 생수가 콸콸 나와서 수도원을 적신다.
학교에 가면~ 책상이 있고, 의자도 있고, 선생님도 있고, ......
우리집 아이들이 자동차 안에서 놀던 말잇기 놀이가 입 속에서 맴돈다.
사막에 가면~ 오아시스가 있고,
진리에 목마른 자는 참생수를 마시게 되고,
고독한 자에게는 영혼의 근원이 벗으로 임재한다.
목마름으로......
밤을 새며 영적 스승들의 책을 읽기 시작한것이 사춘기 때부터이고,
기독교에 입문하여 주 예수를 좇아 살겠다고 서약한 것이 20여년,
교역자생활 18년,
스승을 찾아 다니고, 영적진보를 위한 수련들을 시도해보기를 10년째.
그런데 지금의 나는..... 그럴싸한 설명은 할 수 있으나,
여.전.히. 목.마.르.다...............
내가 사막에 있지 않아서 일까 ?
나는 여전히 '참 생수' 대신 육체의 목을 적실 물이 있고,
고독한 대신 세상의 변화무쌍하고 황홀한 현상과 형상들에서 외로움을 달래려하며
갖가지 대체물들로 위로받기를 즐겨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막과 광야의 길을 지나 다다른 St. 안토니와 St.폴 수도원.
작열하는 저 햇빛처럼 강한 인상을 받으며 나의 눈에는 물기가 스며든다.
마음에 뜨거운 모래바람이 불어와 휘청거린다.
덜컹하고 가슴이 내려앉으며, 가슴 안쪽, 거기... 아릿하게... 아픔이 느껴진다.
이집트인들에게 사막은 사탄이 거하는 곳이요, 저주의 장소이다.
그러나 안토니와 폴은 사막으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영성의 생수가 되어
내가 서 있는 지금까지 흐르고 있다.
예수가 그리했고, 안토니와 폴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들 앞에서 티끌 같은 나 또한 사막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것일까 ?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 '나의 사막은 어디인가 ?'를 묵상하고 있다.
그리고 '나의 사막에서 샘을 찾으라'는 부드러운 이끌림을 느끼고 있다.
-- 2008. 2.29 독립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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