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생 때 책 제목이 감동적인 것이 있었다.
[상처입은 치유자]
난 이 책의 제목이 정말 감동적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이 책을 읽지 않았다.
워낙 책을 좋아하고, 헨리나웬의 다른 책들을 읽었던 내가 왜 이 소책자를 몇 장 넘기지 못했는지 잘 모르겠다. 이 책은 지금도 내 서재 구석 어딘가에 있다.
난 이 책의 제목에서 혼자 추측을 했다.
'목회자는 상처를 입은적 있으나, 이제는 치유되었고, 그래서 치유자가 될 수 있다.'
이런 뜻이 아닐까....
헨리나웬이 동성애자였다는 것을 알게된 것은 그 후이다.
그가 한 수도원의 원장을 사랑하였으나 자신의 사랑을 인정받지 못해 심하게 고통을 겪었다.
그때 쓰여진 글들도 책으로 출판되어 난 그가 무엇으로 고통당했는지 영문도 모른채......영성일지 같은 책을 읽었다.
책 제목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가 동성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그는 분명 상처입은 자이지만 상처가 치유된 자는 아니다.
그의 상처는 아물지 않은 채....생살이 벌어진 채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하나님이 끔찍하게 싫어하시고 진노하시는 동성애에 빠져서 말이다.
왜 갑자기 [상처입은 치유자]를 이야기하냐면,
많은 목회자들이 상처를 입는다. 그런데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채 치유자가 되려고 한다.
그래서, 다시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자신의 상처도 깊어진다.
지금 내가 '상처'라고 말하는 단어는 남에게 받은 '상처'뿐만 아니라, '어둠' '처리되지 않은 죄' 등을 포함하는 포괄적 단어로 쓰고 있다. 우리 스스로 죄를 지을 때에도 우리의 심령은 상처가 나기 때문이다.
상처가 치유되지 않으면, 죄가 처리되지 않으면, 어둠이 빛으로 나오지 않으면
수평적인 지식의 양적 증가는 있을 수 있으나 그 사람의 수직적인 영적성장은 있을 수가 없다.
진정한 치유자는 상처를 극복한 자이다.
적은 우리의 약점, 상처를 잘 알고 있다.
적은 바보가 아니고서야 우리의 약점을 집중공격할 것이 뻔하다.
아물지 않은 상처를 공격할 때 우리는 쉽게 무너진다.
그래서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채 영적성장은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위대해보이는, 유명한 목사님들이 사단의 공격에 어이없이 무너져서 부끄러운 뉴스에 이름을 올리는 것도 그 중에 하나이다.
목회자들은 성도들을 치유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치유해야 한다.
다시 말해, 내 안에 드리운 어두움, 처리되지 못한 죄, 상처로 인해 벌어진 곳을 치유해야 한다.
상처가 있는 곳에는 구더기들이 들끓는다. 어둠에 속한 영들이 먹이를 먹으러 온다.
그러면 어떻게 상처를 치유하는가 ? 상담으로 ? 심리적 요법으로 ?
인본주의적인 심리상담이 이미 기독교에 널리 퍼져있고, 분별도 없이 학문이라고 생각하며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심리상담요법들은 상처에 반창고를 붙이는 정도이다.
인본주의적인 심리상담기법에 기독교적인 설명과 해명, 끼워 맞추기를 통해서 사람들은 은혜를 입는다.
그래서 치유받은 줄 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재발한다.
심리상담요법으로 자신의 이슈 하나가 제거된 듯하다. 그런데, 또 다른 이슈가 생겨난다.
겉으론 편안해졌고, 치유된듯하나, 사실은 속은 아직도 곪아터져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 치유받아야 하는가 ?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답이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우리는 우리의 상처를 드러내야 한다.
하나님은 진정한 치유자의 모든 자격을 다 갖추신 분이다.
치유자 하나님을 잠시 소개하겠다.
<성부 하나님>
1) 심령을 지으신 자에게 치유받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설계도를 갖고 계신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그 누구보다 우리의 심령을 잘 아신다.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자가 가라사대"(슥12:1)
2) 심령을 감찰하는 자에게 치유받아야 한다.
우울증을 앓던 학생이 상담 후 자살을 택했다. 사람들은 상담자가 그것도 몰랐냐고 한다. 누구의 잘못인가 ?
누구의 잘못이라고만 할 수가 없다. 사람의 심령을 정확하게 늘 감찰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잠16:2)
3) 심령이 상한 자를 멸시치 않는 자에게 치유받아야 한다.
사람은 잘 알기에 판단하고 무시한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 자기의 심령을 토로하는 자를 멸시치 않는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성자 하나님>
여기 진정한 [상처입은 치유자]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 !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만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거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53:3)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동정)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성령 하나님>
성부와 성자의 사역에 늘 함께 하시는 분 !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님이시다.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이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어떤 상담치유가나 정신의학자보다 든든하지 않은가 !
상처입은 자들이여 ! 치유자 하나님께 나아가자.
그리하여 [상처입은 치유자]가 아니라, [상처를 극복한 치유자]가 되자.
2012.8.30 하늘다리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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