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추구를 내려놓다.
<신>에 대한 무한한 사랑에서, <신>을 완전하게 섬기는 일을 제외한
모든 동기를 버리려는 의지가 일어난다.
깨달음이 아닌, <신>의 종이 되는 것이 목표가 된다.
<신>의 사랑의 완벽한 통로가 되려면 완벽하게 포기해야 하고,
영적인 자아를 추구한다는 목표를 버려야 한다.
그런 뒤에는 기쁨 자체가 영적인 노력의 기폭제가 된다.
그 과정의 나머지는 기쁨과 겸허한 자세를 통해 저절로 이루어진다.
영적인 탐구의 필수적인 원동력이 영적인 야심(어딘가에 이르고자 하는)이 아니라
<사랑>에 장애가 되는 것들을 차례차례 놓는 것이라면,
훗날 '영적인 에고'가 장애로 나타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그들에게 의미 있고 그들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진리의 핵심 정수를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말합니다,
그것을 하는 방법은 모든 것을 신에게 돌리고,
모든 것과 당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사랑이 되는 것이라고.
그 결과에 대해선 당신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웃음)
.....
“제가 비록 쓸모없고 증오할 만할지라도 당신께 봉사하겠습니다. 비록 그러한 저이지만은 계속해서 섬기겠나이다.”
-호킨스 박사님의 가르침 중에
많은 영성계의 도서들 중에서 내게 가장 공감을 일으키는 것은 호킨스 박사님의 글이다. 호킨스 박사님의 글은 내가 가고 있는 길을 안내하고 있고, 지금의 상황을 이해시켜준다.
그 분의 글이 기독교적 배경을 가져서 내게 더 공감을 일으킬 수도 있겠다.
깨달음을 얻고자 웍샵에 참여하고, 수행을 한지 이제 10여년이다.
그러나, 10여년에 걸친 영적구도의 길에서 얻은 것은 더 크나큰 영적 갈망이었다. 그 갈망은 너무 커서 현실의 삶과의 괴리로 나는 우울과 절망에 종종 빠지곤 했다.
하나님이 그리워서 눈물짓던 날도 수 없었고, 나 자신의 미약함과 어리석음에 가슴을 쥐어뜯고 머리칼을 뜯으며 참회의 기도를 드린 날도 수 없었다. 아무리 처절한 참회를 하여도 얼마 후 나는 또 죄인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이야기를 묵상( Lectio divina)하던 아침이었다.
내면에서 들려오는 말씀은
"분깃을 내게 주소서라고 말한 둘째아들의 요구가 바로 너의 요구이다."라는 말씀이었다.
나는 항의했다.
"내가 언제 둘째 아들처럼 아버지의 재산을 내놓으라고 했나요 ? 나는 모든 것을 접고 오직 당신의 종이 되려고 했습니다."
내면에서 답이 울렸다.
"너에게 분깃은 하나님이다. 너는 이미 계신 하나님을 내놓으라고 보채고 있다."
나는 저항했다.
"주님, 저는 세속적인 것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오직 당신만을 요구했습니다. 저에게 하나님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문제가 되나요 ?"
"나를 갈망하는 갈망, 나를 찾으려는 그 의지조차 내려놓아라"
"....................."
나는 절망이 엄습했다.
13살부터 영적인 책을 탐독하기 시작하면서 20대에 기독교를 만났고, 30대에 목사가 되었으며, 내 삶의 목표는 점점 영적추구로 좁아졌다.40대인 지금 내게 영적추구는 삶의 목표이다.
그런데 그것을 내려놓으라니. 그러면 이제 무엇을, 무엇을 잡고 가야하는가 !
나는 어디로 가야하는가 ?
나는 이제 어찌해야 하는가 ?
목표를 잃어버렸고, 문을 잃어버렸다.
나는 그날 차려놓은 아침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나는 작은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입을 틀어막고 울었다.
"서럽고 아깝냐 ?"
네, 서럽고 아까웠다. 억울했다. 가장 선한 것, 가장 아름다운 것, 가장 영적인 것을 여태까지 추구하여왔다고 자부하였던 그것을 내려놓으라니 여태까지의 삶이 억울했고, 아까웠다. 나는 아까워서 꺼이꺼이 울었다.
그리고 길을 잃어버려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면 나는 이제 어쩌라고.....
그것만이 내게 자유를 주고, 진정한 행복을 주고, 삶의 의미를 준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나는 어쩌라고.....
나는 한동안 영적 우울 가운데 있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기에 더 이상 수련하는 것이 의미가 없었고, 기도도 할 수 없었고, 그냥 하루 하루 살았다. 그냥 육체가 하자는대로, 숨쉬고, 밥먹고, 내가 꼭 해야할 일만 최소한으로 하면서 얼마간 그렇게 있었다.
우울이 가실 쯤에 내 안에서 수용이 일어났다.
나는 나의 어리석은 모습을 받아들였고, 내가 얼마나 연약한지도 받아들였다.
나는 결코 영적으로 수준이 높지도 않음을 인정했다. 나는 나의 평범함을 인정했다.
그리고 고요해졌다.
새로운 위치성이 생겼다. 그것 또한 위치성을 갖고 있지만 편안한 위치성이다.
비록 형편없고, 모자라지만 신에게 그러한 나를 봉헌했다. 나는 신과 합일 하겠다거나, 깨달음을 얻겠다거나, 위대한 영성인이 되겠다거나 .........무엇인가가 되겠다는 것을 접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했지. 그저 삶의 사소한 것부터, 내 앞에 나타나는 모든 이들을 그저 사랑하면서 그냥 그렇게 살자고 했다.
물론, 이것도 무엇인가가 되겠다는 새로운 위치성일 수 있다.
나는 이제 그런 것은 모르겠다. 그냥...내 앞에 나타나는 모든 것을 아껴주고 사랑해야지. 그것은 내 안에 원래 있던 것이어서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다른 이를 침해하지 않고 강제하지 않으면서 그냥 한번 더 친절하게 말하고, 한번 더 생각해서 따뜻하게 대해주고 그렇게 살면 되었다. 내 가슴이 노래하는대로, 사랑이 하자는대로 그냥 살자 !
그리고 공적으로 나는 기독교의 성직자로서 주의 종이지만 종처럼 살지 못했다. 직무유기한 것이다. 내가 하고픈 것만 순종했으니까. 그래, 이젠 진정 하나님의 종이 되자.
위대한 무엇이 되겠다는 위치성을 접었지만, 난 대신 종이라는 위치성을 갖기로 했다. 그것이 편안하므로. 그저 주인에게 헌신하고, 주인 앞에서 무익한 종으로 살자.
어린아이처럼, 무엇이든 주님께 물어보며, 주님의 뜻을 여쭈며.....내 의지를 주님의 의지에 순복하며 그렇게 살자.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한복음5:19)"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요한복음8:38)
나는 그저 주인의 의지를 실현시키는 통로가 되자 !
사실 이 위치성들은 오래토록 계속된 나의 기도였다.그리고 지금도 드리는 기도이다.
2006년에 이 일이 내게서 일어났지만, 지금도 내게서 진행되고 있는 일이다.
오늘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눈물이 난다. 이제 아까운 것은 없다. 아직 아까운 것들이 남아 있을 수 있다. 내가 깨닫게 될 때 그것은 가장 적절한 때에 적절한 만큼만 드러날 것이다. 그래도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그것은 한번에 되지 않는다. 내 경우는 조금씩 놓아진다.하나씩, 차례대로....
모든 것은 적절하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의지 안에 있기에.
눈물은 호킨스 박사님의 아래 글을 읽으면서 내게 촉촉히 젖어드는 그 무엇이 육체로 표현된 것이다.
“제가 비록 쓸모없고 증오할 만할지라도 당신께 봉사하겠습니다. 비록 그러한 저이지만은 계속해서 섬기겠나이다."
아멘 ! 사랑합니다. 주님을, 이웃들을, 여기 널브러진 사물들을, 그리고 이렇게 눈물젖어 있는 그대 주희를.
2009.3.7 주일예비일에 하늘다리 전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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