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명, 신자는 다 지혜로운가?
변명, 신자는 다 지혜로운가?
살아가면서 우리는 종교인에 대한 몇 가지 오해를 본다. 무신론자들이 종교인들은 무식하고 엉터리다라는 생각과, 신심이 깊으면 모든 것을 안다라는 신자들의 생각이다.
무신론자들의 오해와 왜곡에 대해서는 그들이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제쳐두고라도, 우리 내부 안에 있는 후자의 오해는 도처에 있다.
성직자는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거나 적어도 더 지혜롭다는 신자들의 믿음.
신자라면 국가와 국민을 지혜롭게 이끌거라는 믿음.
과연 그러할까 ?
어느 세미나에서 비교종교학을 전공하고 막 귀국한 한 형제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 형제는 내게 물었다.
"목사님께서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면서 .... 지점까지 들어갔으니, ....에 대해서 아는 것입니까 ? "
내가 어떻게 대답했을까 ?
나의 대답은 "모른다" 였다. 나는 사실 모른다. 나는 내가 모르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신과 가까이 교제하고 있고, 성경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해도 그 깊이와 앎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다. 또 양자물리학에 대해서 우리가 양자물리학자들보다 알고 있을까 ? 내가 예수님과 동행한다고 해서 요리를 잘 할 수 있을까 ? 내가 신심이 깊다고 정치를 잘 하고, 정교한 기계를 만질 수 있을까 ?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소크라테스는 [변명]에서 자신을 재판하러 온 아테네 시민들에게 자신이 무죄함을 변명하는 가운데, 먼저 오래된 소문 속의 죄명에 대해 변명하면서 신을 증인으로 내세우기 시작한다.
어느날 소크라테스는 델피신전으로부터 자신이 가장 현명하다는 신탁을 받게 되고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무지함을 증명하기 위해 현명하다는 사람들을 찾아다닌다.
먼저 국가와 국민을 올바르게 인도한다고 주장하는 정치가를 찾아갔는데, 적어도 인간에게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에, 모르고 있으면서 자신이 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후 소크라테스는 시인들, 비극작가들, 작가들을 찾아간다. 그들에게서 소크라테스는 그들의 작품이 지혜가 아니라 천성적으로 타고난 감각이나 영감으로 짓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예언자나 신탁을 전하는 사제처럼 훌륭한 것들을 많이 말하고 있지만 정작 자신들은 그것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는 장인들을 찾아간다. 장인들은 소크라테스가 알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이점에서 그들은 소크라테스보다 현명했다. 그런데 장인들 또한 정치가나 작가들과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들의 기술을 잘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중요한 일들에 있어서도 자신이 가장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무지하다고 알고 있는 자신이 더 현명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소크라테스가 가장 지혜로운 이유 ! 즉, 자신은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하는 것이 아닐까 ?
한국기독교의 다수는 짧은 역사 속에서 신자를 뽑으면 하나님의 손발이 되어 국가를 잘 이끌 줄 알았다. 그런데 결과는 '정치지도력은 신앙심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반복해서 보고 있다.
*야훼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시 111:10편)고 하였는데 그것이 아니란 말인가 ?
우리는 이런 의문에 빠진다.
물론, 깊은 신심은 어느 정도의 지혜와 안목을 갖게 한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삶의 어려움을 겪을 때에 목회자나 신앙의 연륜이 깊은 이에게 상담을 한다. 그러나, '그들이 삶의 지혜가 있냐 ?'는 부분에서 원론적인 부분에서 상당히 그렇긴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며 세부적인 사항에서는 자신보다 모르는 부분이 많음을 알게 된다.
인간이 모든 것에 완벽한 지혜를 갖고 있다면 그는 신일 것이다.
아쉽게도 인간은 인종과 국가차원에서부터 사회-문화적으로 또 자신의 가문과 개인적 삶에서 수많은 고정관념과 선입견과 여러 가지 경험에서 오는 필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인간의 육신을 갖고 있는 이상은 완전하게 지혜로울 수 없다.
성인이라 추앙받는 이는 실수를 하지 않을까 ? 모든 생각이 완벽할까 ? 그렇지 않다. 나는 그분들의 고귀한 명성을 훼손하고 싶지 않기에 밝히고 싶지 않다. 완벽하지 않다고 실망할 것도 없고, 비난할 것도 없다. 그들은 그러한 명성을 얻을 만큼 충분히 위대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지혜를 구해야하는가 ?
*시 19: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미 알고 있다는 교만에서 벗어나서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객관적인 말씀인 '캐논', 즉 기록된 성경으로 "매-순-간" 돌아가 말씀 앞에 서야 한다.
사탄은 성경말씀조차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왜곡시키며 거짓자아를 부양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신앙인의 지혜와 매순간 말씀 앞에 조명을 받는 성령의 이끄심을 받는 이의 지혜의 차이점이다.
둘째, 하나님과 깊은 지점에 들어가서 교제하는 것은 은혜이지 나의 공로가 아님을 인식하는 것이다.
많은 영적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지만 실수하고, 죄를 짓기도 하고, 잘못된 판단으로 많은 사람들을 고통에 빠트리기도 하였다. 은혜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선물이지, 내가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전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지혜는 쌓이는 것인가 ? 세상적인 인식은 그러할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는 "매-순-간" , "그-분-에-게-서" 공급되는 것이다.
나는 나의 삶을 두고 볼 때에, 부끄럽게도 내게 믿음이 없음을 고백한다. 내게는 "매-순-간" ,"그-분-에-게-서" 공급되는 그분의 믿음이 은혜로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신심 또한 없으며, 그저 그 분의 지혜를 구하며 사는 수 밖에 길이 없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소크라테스의 무지함에 대해 긍정의 고개를 끄덕인다.
주도권은 내게 없다. 우리는 문 앞에 서 있는 걸인처럼 그분의 은총을 구하는 자인데, 그 분은 그러한 우리에게 황자, 황녀처럼 대우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극에 나오는 신하들처럼,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무지함을 안다면,
그리스도인은 지혜로울 것이라는 맹목적인 믿음에서 벗어날 것이고,
좀 더 지혜로워지는 길이 바로 여기 '무지함을 깨닫는데'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자리가 바로 은혜의 자리이므로 !*
*관상지원단 2008.7월 세째주 묵상글 (전주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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