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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49회 독일의 신비주의자 에크하르트/근본적 `무`서 출발 `내적 자아` 관심

00하늘다리 2007. 3. 17. 20:36

제49회 독일의 신비주의자 에크하르트/

         근본적 '무'서 출발 '내적 자아' 관심

 


극단적 신비주의로 생전엔 이단 정죄 … 사후 '중세유럽 선각자'로 존경
독일에 소논문 · 라틴어 설교집 등서 영혼과 하나님과의 연합 설명
 
 
독일 신학자며 신비주의자인 마이스테르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7)는 파리와 쾰른에서 신학교수로 지냈고, 도미니크 수도회에 속한 목회자며 지도자였다. 중세 말기에 라틴어가 아닌 자국어, 즉 독일어로 설교했던 인물이다. 다른 신비주의자들, 수소, 타울러, 그리고 루이스브로에크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생애는 이단성 있는 자로 정죄 받게 된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그의 작품은 중세유럽의 위대한 선각자로 존경을 받기도 한다.
 
에크하르트는 15세에 독일 엘푸르트에 있는 도미니크 수도회에 가입한 그는 후에 부수도원장이 되었고, 1300~1303년 파리로 가서 강의를 했다. 다시 엘푸르트로 갔다가 파리로 되돌아와서 1306년 참사회원이 되었다. 1311년 에크하르트는 나폴리의 참사회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스위스 스트라스부르그에서 활동했다. 그런데 1306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에크하르트는 이단성 있는 자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에크하르트는 독일 쾰른에서 가르치는 사역을 행하고 있었는데 대주교 헤르만 폰 비멤부르그는 그를 이단자로 고소했다. 그 이유는 베가르드들(Beghards)과 같다는 것이었다. 남부 유럽에서 활동하며 여성들로 구성된 베긴회(Beguines)와 남성들로 구성된 베가르드가 있다. 이들은 모두 지상에서의 죄 없는 완전함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믿었던 자들이었다. 이러한 열정은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이 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선할 수 있음을 선포하기 시작했다.
 
에크하르트를 변호했던 스트라스부르그의 니콜라스까지도 헤르만은 고소했다. 그 내용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자세한 기록이 없으나 아무튼 1329년 3월 27일 로마교황 요한 22세는 엑하르트를 이단성 있는 자로 정죄 했다. 엑하르트는 임종 직전에 자신이 잘못 전한 모든 것에 관해 철회했다고 전해진다.
 
 
사상

그가 죽은 후 신비주의 운동이 대중적이 되었다. 그의 작품들은 큰 영향을 끼친다. 그가 끼친 사상들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에크하르트는 자신이 듣거나 배운 것에서 말하지 않고 직접 경험한 것을 기초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에크하르트는 자신의 참된 본성, 즉 내적 자아를 깨닫고 싶어 했던 자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깨달은 '내적 자아'란 모든 특성들을 상실한 '사막'으로 표현된다. 즉 모든 것을 비운 상태를 말한다. 즉 무(無)라는 개념이다. 이는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무와 같다고 하겠다. 영혼의 본질은 물이나 공기와 같이 청명하다. 에크하르트는 우리를 청명한 빛을 깨닫도록 초청하며, 신격을 느끼도록 초청하며, 그리고 결코 메마르지 않는 샘물로 초청한다고 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신선함을 만끽한다. 그 신선함은 곧 영생이다.

 
모든 것은 무에서 시작한다. 우리의 근본적 무를 깨닫게 될 때 우리의 근원을 깨닫게 된다.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라 한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의 지식과 그분이 세상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영혼에 대한 지식을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고 한다. 이러한 지식은 교회에서 지켜온 전통적 신앙에서도 발견할 수 있지만 구원을 받고자하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한다. 에크하르트의 궁극적 관심은 교회의 관심이 아니라 신성, 즉 신적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라기보다는 신적 존재라는 말을 선호한다. 그 존재는 절대적인 존재로서 무한한 존재 또는 충만한 존재라고 한다.
 
에크하르트가 말하는 삼위일체는 신적 존재, 즉 절대적 존재의 자기계시라고 한다. 성부는 창세기, 즉 기원과 같은 분이고, 스스로 있는 분이라고 한다. 성부는 성자를 낳는다(procreated). 성부는 성자를 통해서만 성부가 될 수 있다. 성자는 모든 면에서 성부를 닮았다. 성부의 본질은 성자의 본질과 동일하다. 두 분의 본질은 신적 존재의 본질과 동일하다. 두 분이 서로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가운데 성령은 일어난다. 이러한 일어남은 영원한 가운데 일어난다고 한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은 신적 존재 안에 있는 한 부분들이라고 한다. 비이성적 피조물 안에 하나님의 어떤 것이 있다. 영혼 안에 하나님의 신성으로 존재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으로 모든 피조물들에게 말씀하신다. 오직 이성적 피조물들만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영혼 안에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것이다. 영혼은 곧 하나님의 형상이다. 에크하르트는 '섬광'(spark) 또는 '작은 섬광'이란 용어를 사용합니다. 이 말은 영혼의 기원이 곧 신성이라는 것을 의미하는데서 사용된 것이다.
 
그는 독일어로 네 개의 소논문을 쓴다. '교훈집', '신적 위안집', '귀족과 초월에 대하여' 등이다. 그리고 라틴어로 '설교집', '성경 주석집', 그리고 '파편들' 등을 썼다. 이런 작품들을 통해 에크하르트는 영혼과 하나님과의 연합하는 단계를 설명했다.
 
 
평가

에크하르트는 신플라톤주의자였다. 삼위일체론 설명은 이러한 철학을 반영한다. 그의 사상은 극단적 신비주의에 속하는 것으로 현재 유행하고 있는 영지주의적 관상신학(contemplative theology)와 유사하다고 하겠다.

 
 
'영적 가난'에서
 
"자유 안에 영적 균형을"
 
 

이 글에서 에크하르트는 네 가지의 영적 가난을 이렇게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가 영원토록 부유한 것처럼 영원토록 가난해보도록 합시다. 우리의 본질 안에 계신 그분 안에 거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 안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물들 안에 그리고 창조주 안에 우리는 거할 것입니다. 제대로 된 모양을 갖추질 못해도 하나님을 알 수 있을 것이고, 물질이 없어도 사랑할 것이고, 그리고 소유가 없어도 즐거워할 것입니다. 영원한 지혜가 모든 사물들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이 완전함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영적 가난은 사물들과 모든 피조물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 디오니시우스는 무(無)에서 그분을 더욱 알게 됩니다. 그분은 무이십니다. 모든 것은 무 안에서 정지 상태에 있게 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에서 정지 상태에 있습니다. 하늘과 지상에 있는 모든 마음들은 깨달을 수도 없고 감찰할 수도 없는 분은 바로 지금 언급한 무(無)라는 존재이십니다. 그 존재는 피조물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영혼이 무로부터 정지 상태에 있음으로 완전에 이르게 될 때야 비로소 죄 없는 자신(영혼)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영혼이 자유 안에 균형을 갖고 있을 때 가능합니다. 영혼이 몸에 이르고 스스로를 깨닫게 되고, 또 이전에 지었던 죄를 깨닫게 될 때, 영혼은 일어나서 스스로의 모습을 되찾을 것이고 자신이 멍에를 메고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영혼은 자신 밖으로 나아가서 모든 행복의 좌소와 만족에 이를 것입니다. …
 
영혼의 가난에는 여러 종류, 즉 네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서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사물들에 진리의 영으로 인해 조명될 때야 비로소 영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말합니다. 이런 가난 속에 영혼은 모든 피조물들이 넌더리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두 번째 가난 안에서 영혼은 자신의 모범이신 그리스도와 자신의 결점을 보게 되며, 자신의 사역들이, 즉 사람들이 성취한 총체적인 일들이 무가치함을 깨닫게 됩니다. 영혼은 ‘사랑의 책’에서 자신을 두고 흐느껴 웁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의 사랑하는 모습이 사라졌구나. 이제 더 이상 그분을 따를 수 없구나.' 이 구절에서 우리가 엿볼 수 있는 것은 영혼이 자신을 저주하고 있다는 것이고 자신의 근원을, 즉 그리스도를 찾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의 향기는 너무나 달콤합니다. …
 
세 번째 영혼의 가난은 자신의 본성이 죽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본성적 삶이 죽도록 돌에 맞으면서 하나님의 영외에는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살아 있습니다. 나의 삶은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삶'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이런 영적 죽음 안에서 영혼은 가난하게 자라갑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떠나야만 하거나 주어야만 하는 모든 것을 가난으로부터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
 
네 번째 가난은 마음속에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식이나 행적으로 그분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영혼 자신이 더 깊게 내려가면 갈수록 신성에 대한 불가지론적 탁월함이 자신의 가난 안에 잘 반영될 것입니다. 내적 사람과 더불어 영혼이 신성을 직관하게 되는 한 영혼은 자신의 모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을 외적 사람과 더불어 따를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자신의 모든 이기심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벗어버릴 때 영혼은 자신이 필요한 모든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만일 영혼이 여전히 이기심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으로 인해 아무 것도 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 
 
 
실제적인 죄는 신적 사랑의 법에 불복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벗어납니다. 그분은 모든 사물들의 형태와 본질이십니다. 그러면 실제적인 덕행은 무엇일까요? 신적 사람으로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영적 가난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참된 가난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선하심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아멘."  
 

출처 : 푸른 향기
글쓴이 : 푸른향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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