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땅

[스크랩] 해양제국 남부여 백제의 흥망성쇠 A to Z

00하늘다리 2009. 9. 4.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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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의자대왕의 실정이 백제의 멸망원인? (출처 : 책을 벗 삼아 블로그 / 글쓴이 : 문화재지기)

 

신라 오만대군을 맞아 처절히 싸운 백제 계백 장군과 오천 결사대의 투혼을 기리는 황산벌 전투 재현 그것은 기울어가는 백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로부터 기나긴 누명과 오역은 시작됐다. 660년 7월 18일 웅진성의 달빛 아래선 거대한 음모가 진행됐다. 1300여년의 세월 진실이 드러났다. 그것은 철저하게 가려졌던 백제멸망과 의자왕 항복에 관한 충격적인 역사 보고서였다.

 

[역사추적] 의자왕 항복의 충격 보고서, 식진지명

 

저는 지금 삼국사기 의자왕 편을 보고 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의자왕은 황음, 삼천궁녀, 망국제왕과 같은 치욕적인 수식어를 항상 달고 다녔던 무도한 임금의 대명사였습니다. 헌데 이런 의자왕이 제위 기간 내내 대단히 정렬적인 대내외 통치활동을 펼쳤다는 사실이 조금 의외군요. 나당연합군에게 허망하게 항복하면서 백제의 멸망을 보고 말았던 이 의자왕이 활발한 정복전쟁을 벌이고 강력한 왕권강화를 시도했다. 사실 좀 연결이 되지 않는 부분들입니다. 얼마 전 백제의 멸망을 둘러 싼 새로운 사실을 담고 있는 유물이 발굴됐습니다. 자 지금부터 저와 함께 의자왕의 최후를 둘러싼 충격적인 역사를 추적해 보겠습니다.

 

 

중국낙양 황하의 물줄기가 고대 중국의 문명을 이루었던 곳이다. 고대문명의 중심지였던 낙양에는 수천 년에 역사가 간직된 유물이 발굴돼 세상을 놀라게 한다. 뜻밖의 유물들이 나타나서 고대사 연구에 활력을 불어 넣기도 한다. 얼마 전 이곳에서 백제와 관련된 유물 한 점이 등장했다. 왜 백제 유물이 낙양에 등장했을까? 제작진은 이 유물의 행방을 수소문 해봤다.

 

“백제국 유물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그건 탁본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백제국 유물 들어본 적 있으세요?”

“백제국 들어본 적 없어요.”

“당대의 묘지명이 나왔다는 것도 못 들었어요?”

“당대 묘지명은 아주 많아요.”

“이건 언제 거예요?” / “청나라시대요.”

“그럼 백제국 비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으세요?”

“없습니다. 신경을 안 써서… 아마 아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이곳엔 도굴성 유물들도 있기 때문에 출처나 향방에 대해서 솔직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며칠 동안 수소문 했던 우리는 그 비를 한 중국학자가 사진으로 찍어 갔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제작진은 일단 그 교수를 만나 유물에 향방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그는 오랫동안 낙양에서 고대유물을 연구하고 있는 조우쩐화(고고문물연구가) 교수였다. 중국 고대 금석문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역사학자다. 조우쩐화 교수는 유물의 탁본을 사진으로 갖고 있었다. 그런데 사진은 두 장으로 된 묘지명이었다. 묘지명은 망자의 무덤에 넣는 금석문이다.

 

 

묘지명의 주인공은 대당좌위위대장군이란 정3품에 고위직은 지낸 사람이었다.

 

조우쩐화 고고문물연구가

“좌위위는 우위위와 더불어 전부 당 왕조의 16위중 하나입니다. 이 16위는 조정의 금위군입니다. 전문적으로 황제와 조정 그리고 수도의 안전을 도모하는 부대의 장수입니다. 황제가 신뢰하고 의지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묘지명에 백제와 웅천인이란 글자가 눈에 띠었다. 百濟熊川(백제웅천) 즉 웅진 오늘날의 충남 공주 출신이었다. 어떻게 백제인이 당나라에서 고위직을 지냈을까? 유물은 진품일까? 취재 도움 요청에 조우쩐화 교수는 어딘가에 전화를 해보더니 유물소장 기관이 방송에 공개를 꺼린다고 좀 더 알아보고 나서 다시 연락하게다고 하였다. 왜 백제 웅진 사람이 이곳에 묻힌 것일까? 기대와 불안이 교차했다. 며칠 후 다행히도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러나 묘지명의 실물을 취재진에게 보여줄 수는 있지만 방송촬영은 안된다고 했다. 현장에서 설득하기로 하고 급히 묘지명이 있는 낙양 2이공대학으로 갔다. 우린 조심스럽게 묘지명을 촬영하게 해줄 것을 부탁했다.

 

시린후이 낙양 2이공대학 문물연구원

“왜냐하면 지금 아직까지 연구 단계에 있습니다. 아직 공개를 하자 않아서 제 생각에는 찍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무언가 다른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묘지명이 창고에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있어서 촬영이 부담스럽다는 것이었다.

 

시린후이 낙양 2이공대학 문물연구원

“한국에서 손님이 몇 분 오셨는데 우리 진열실을 보고 싶어 하세요.”

 

 

 

간신히 촬영허락을 받았다. 우리를 안내한 곳은 이 학교의 탁본 전시실이었다. 창고에서 꺼내온 문제의 묘지석이 탁자에 올려지는 중이었다. 사진속의 묘지명이었다. 아직 중국에서도 실물이 공개된 적이 없다. 지석과 덮게인 개석으로 된 묘지명은 둘 다 글자 한자 파손됨이 없었다. 측면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개석을 화려하게 장식한 것은 당나라의 대표적인 당추문, 지석의 사면엔 십이지상이 마치 종이에 그린 듯 생생하게 새겨져 있었다.

 

 

 

선명하게 새겨진 百濟熊川人. 백제 마치 백제 고대인을 보는 느낌이다. 묘지명은 중국에서는 수나라와 당나라 시대에 가장 유행했고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대거 매장됐다. 묘지명의 글씨를 정확히 알기 위해 탁본을 떠보았다. 묘지명은 망자와 함께 바로 묻히기 때문에 당대의 기록들이 왜곡되지 않고 담겨 있어 어떤 기록물보다 역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다. 지석에는 빼어난 필체 문장들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문장의 내용은 묘지명 특유의 은유적인 표현들로 돼있어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예식진 할아버지 譽多(예다)와 아버지 思善 모두 백제 최고 직위인 좌평을 지낸 유력가문 출신이었고 614년에 태어나서 678년 58세의 나이로 사망한 것은 한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이 묘지명은 백제 출신 한 장군의 생애를 뛰어 넘는 엄청난 백제사의 비밀을 담고 있었다. 대당 좌위위대장군, 百濟熊川人, 좌평 집안 예식진은 누구인가?

 

지금 보시는 이것이 바로 어렵게 입수한 대장군 예식진 묘지명의 탁본이 되겠습니다. 상당히 정밀하게 만들어졌죠. 원래는 죽은 사람들의 묘지엔 이처럼 묻혀 있었겠죠. 1300여년 만에 불쑥 나타난 인물 예식진. 이 사람은 원래 백제 사람인데 당나라에 의해서 중용이 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이처럼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리고 당나라에는 왜 갔던 걸까요. 예식진의 생몰 년대를 보면 서기 614년에 태어나서 672년에 사망했다. 이렇게 돼있습니다. 상당부분 그의 생애가 백제의 멸망 시기와 겹쳐지죠. 그렇다면 백제가 멸망하던 시기를 살펴보면 이 예식진의 흔적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660년 11월 1일 당나라의 동도였던 낙양 응천문에선 특별한 행사가 벌어진다. 당 고종은 이곳에서 소정방이 백제에서 잡아온 전쟁포로들을 접수했다. 포로들은 의자왕와 88명의 왕족 및 고위관료 그리고 일만 이천 여명의 백성들이었다. 백제 최고 벼슬인 좌평집안의 출신인 예식진도 이들 포로 중 한 명이었을까? 그 가능성을 왜의 사신 이키노무라치 하카도코(당체류 중이던 왜의 사신)의 증언에서 엿볼 수 있다. 당시 그는 당나라에 머물다가 이날 행사에 참석했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그의 목격담을 보자. 의자왕과 왕자 13인, 대좌평 사택천복, 국간성 등 37인, 모두 50여인이 조당에 나갔다.1) 왕족 외의 포로들은 백제 최고위직들이었다. 그렇다면 최고위직인 좌평집안의 예식진도 전쟁포로로 이때 당나라에 끌려 왔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백제 고위층 집안이 예씨가 백제 멸망 때까지 역사서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이 비는 의자왕 때 좌평을 지낸 사택지적이 인생무상을 한탄하며 세운 비다. 백제는 부여, 사, 진, 해, 협, 목, 국. 백씨 등이 주요 지배층에 성씨였고 당연히 그 성은 역사서나 금석문에 등장한다.

 

이도학 교수

“종전에는 확인되지 않았던 그런 가문의 존재가 이 묘지명을 통해서 처음으로 드러났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좌평을 역임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대로 역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가문의 존재 또 인물들이 문헌에서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굉장히 의아스럽다고 좀 이상하다고 이런 느낌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최고 귀족층이면서 역사서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예씨 가문의 비밀 이것은 뭘 의미하는 것일까? 그 의문은 흑치상치 묘지명에서 풀리기 시작했다. 흑치상지 묘지명은 낙양에서 1920년대에 발견돼 현재 남경박물관에 보관중이다. 흑치상지는 예식진과 같은 시대에 백제 장군으로 좌평 다음 직급인 달솔을 지냈다. 백제 패망 후 당에서 예식진과 비슷한 우무위위대장군은 지냈다. 그런데 흑치상지 묘지명엔 증조부 대부터 집안 내력이 적혀있다.

 

조우쩐화 고고문물연구가

“중국에서 발견된 당 시대의 묘지명은 선조를 설명할 때 보통 그의 증조부부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흑치상지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식진의 묘지명은 그의 선조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예식진의 묘지명에 왜 증조는 기록되지 않았을까? 예식진은 웅천 즉 지금의 공주에서 614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략 590년 생 조부는 대략 570년 생 정도가 된다. 조부와 아버지는 무왕 때에 좌평이 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도학 교수

“예식진 묘지명에 보면 이제 증조부는 기재돼 있지 않고 할아버지 때부터 이제 좌평에 오른 기록이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 비춰볼 때 예식진 가문은 할아버지 때 와서 중앙정계에 핵심적인 그런 위치로 부각되지 않았겠는가 이렇게 판단이 됩니다.”

 

예씨 가문은 600년대에 백제 신흥정치 세력이 셈이다. 가문의 역사가 짧더라도 어딘가 예씨 가문의 흔적이 있지 않을까. 의문의 장군 예식진. 그의 족적을 찾아 예식진 생존 때의 한중일 기록을 샅샅이 뒤져보았다. 어디에서도 예식진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신당서 소정방 열전에서 유일하게 또 다른 예씨를 찾을 수 있었다. 소정방은 660년 나?당 연합군의 총사령관이었다. 소정방 전의 내용 중 의자왕이 항복했던 상황을 기록한 대목에 웅전성에 ‘그 장군 예식이 의자왕과 함께 항복했다’라는 기록2)이 있다.

 

의자왕은 660년 7월 18일 수도 사비가 아닌 웅진성에 항복한다. 그런데 왜 구지 장군 예식과 같이 항복했다고 기록했을까. 의자왕과 같이 항복한 웅진성 장군 예식은 누굴까? 잠깐 의자왕이 웅진성에서 항복할 때 같이 항복한 장군 예식, 웅진성 장군 예식, 웅진 사람 예식진, 대대로 좌평을 지낸 웅진귀족집안 예식진과 의자왕과 함께 웅진에서 항복한 웅진성 장군 예식의 관계는......

 

예식진 묘지명을 통해 예식은 예식진과 같은 웅진성의 예씨 집안 장군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예식은 의자왕과 항복할 때 한 번 등장하고 전혀 보이질 않는다. 1400년 전에 사라진 웅진성 장군 예식과 1400년 만에 홀연히 나타난 웅진 사람 예식진. 가문, 출신지, 직위, 활동기간 등이 너무나 일치한다. 중국시안의 섬서사범대학. 경북대학교에서 당과 한반도 관계사로 박사학위를 받은 배근홍 교수는 예식장군을 독특하게 해석했다. 예식과 예식진은 같은 집안 이상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섬서사범대학 역사학과 배근홍 교수

“미스(예식)... 뒷발음 식... 미식(예식) 미스진(예식진)... 미식진. 추정컨대 예식은 당나라에 도착한 뒤에 자기 이름을 쓸 때 중간에 변화가 생겨 예식을 한자 예식진으로 바꾼 겁니다. 지금 현재까지 파악한 바로는 이 두 사람은 동일인입니다.”

 

 

삼국사기에도 동일인의 이름을 다르게 기록하는 일은 흔히 있다. 용수 또는 용춘, 진순 또는 진춘, 흠춘 또는 흠순.

 

김영관 청계천문화관 관장/백제사 전공

“그 당시에 한자에 어떤 글자를 쓰느냐는 가차(한자음만 빌려 씀)문제가 있기 때문에 음만 같으면 거의 같은 글자를 쓴다고 보고 한자를 더 쓰느냐 덜 쓰느냐는 표기상의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은 동일인물로 보는 게 합당하다고 봅니다.”

 

당의 정3품 대장군 예식진은 패전국 백제의 옛 예식장군이었다. 그러나 예식진 묘지명은 예식진과 예식의 동일인물이라는 차원을 넘는 백제 마지막 날의 충격 보고서였다. 백제의 예식장군은 어떻게 전쟁포로에서 당나라 대장군이 됐을까?

 

1300여년 만에 불쑥 나타난 정3품 대당좌위위대장군 예식진 그가 바로 백제 마지막 임금 의자왕과 함께 했던 웅진의 예식장군이었습니다. 대단히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예식진은 의지왕의 최측근이었던 셈입니다. 헌데 왜 의자왕은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사비성이 아닌 예식이 대장으로 있었던 웅진 그러니까 지금의 공주에서 항복을 했던 것일까요.

 

 

의자왕은 660년 7월 14일 예식 장군과 함께 웅진성에서 2차 방어선을 구축하고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대비하고 있었다. 의자왕의 친고구려 반당노선은 당나라와의 마찰을 일으켰고 이는 20년에 걸친 신라의 파병외교에 맞물려 마침내 당나라에 침공을 초래한다. 당군은 서해를 가로질러 660년 6월 21일 인천 앞바다 덕물도에 도착했다. 예상치 못했던 나?당연합군에 전격적인 양동작전은 백제의 방어 대책에 큰 어려움을 주었다.

 

칠십 평생을 신라와의 전투로 단련된 백전노장 의자왕도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시간이 문제였다. 나?당연합군은 예측을 뛰어넘은 엄청난 속도로 진격하고 있었다. 신라군은 이미 백제의 요충지 탄현을 넘어섰다. 삼국시대의 보편적인 전술은 거점성 점령 후 주변을 평정하고 차근차근 진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합군은 전투의 기본 틀을 깨버렸다. 목표는 영토가 아니라 백제멸망 중간 방어성을 무시하고 사비도성으로 직진하고 있었다.

 

 

전황은 긴박했다. 의자왕은 신라군 없이는 당군이 섣불리 싸우지 않음을 간파하고 결사적으로 돌진해오는 신라군 저지를 위해 계백의 오천결사대를 황산벌로 급파했다. 직진해오는 신라군을 막기 위해선 사비로 가는 길목 황산벌에서 사생결단의 전면전을 벌어야 했다.

 

나종남 교수 육사군사사학과

“소수의 병력을 가졌던 계백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전술은 아마도 성을 하나 택해서 성에 들어가서 수성전을 하면서 장기전을 하는 것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신라가 택한 전략이 수성전에 응하지 않고 곧바로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으로 진격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계백으로서도 신라군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벌판인 평야에 나와서 신라군과 결전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고 판단이 됩니다.”

 

 

오천결사대의 중요한 임무는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660년 7월 9일부터 10일까지 황산벌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다. 오만 신라군은 백제 오천 결사대에 철벽방어선에 가로막혀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오천 결사대의 처절한 투혼은 4전 4승 믿기지 않는 전과를 올렸다. 계백의 오천 결사대는 이틀 동안 최선을 다해 싸웠다. 그러나 수적 열쇠로 우리 역사상 가장 비장한 장면을 남기고 황산벌에 전설이 되었다. 백제군은 사비 남쪽에서 18만 연합군과 최후의 전면전을 벌이지만 정면 승부는 역부족이었다. 일만의 사상자를 내고 패배한다. 신라 군부는 비교할 수 없는 연합군의 전투력이었다. 결국 패전 5일째인 660년 7월 13일 의자왕은 웅진으로 지휘부를 옮긴다. 그날 밤 사비도성은 더 이상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견디지 못했다.3)

 

전선은 웅진의 2차 방어선으로 이동한다. 대규모 나?당연합군을 방어하기엔 평지인 사비도성보다 험준한 웅진성이 훨씬 효과적이었다. 의자왕이 웅진성을 2차방어선으로 잡은 또 다른 배경엔 웅진의 유력가문 예씨 집안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묘지명에 등장하는 할아버지 예다와 아버지 사선 그들도 의자왕의 아버지 무왕 때 웅진성을 지키고 있었다. 무왕은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627년(무왕 28년) 군사를 일으켜 군사를 웅진에 주둔했다. 4개월 동안 웅진은 임시 수도였다. 630년에도 무왕은 사비 중건을 위해 웅진성에서 7월까지 머물렀다.4)

 

이문기 교수 경북대 역사교육학과

“예식진의 아버지, 할아버지가 좌평이었다고 한다면 그들이 좌평으로서 활발한 정치활동을 했던 시기는 의자왕의 부왕인 무왕시대로 추정을 해볼 수가 있는데 그 무왕시대부터 왕실과 일정한 관계를 맺고 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의지왕은 예씨 귀족에 대한 기대도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예씨 집안에 대한 기대와 더불어 의자왕이 웅진성을 제2방어 사령부로 삼은 또 다른 요인은 임존성이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이다. 임존성은 백제 멸망 후 백제 부흥군이 나?당연합군과 3년 동안 싸울 때 마지막까지 버텼던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이곳의 흑치상지 가문 또한 의자왕의 든든한 엄호세력이었다. 사비의 십팔만 나당군이 웅진성을 공격하면 임존성의 흑치가문이 측면 지원하는 양상으로 전선이 그어진다. 의자왕이 항쟁을 이끌고 갈 자신이 있었던 것은 웅진성이나 임존성 같은 지방군이 건재했기 때문이다.

 

 

백제 지방군의 전력이 얼마나 강했던가를 확인시켜 주는 유물이 있다. 백제에 주둔했던 당군 사령관 유인원 기공비다. 마모돼서 희미한 기록에서 백제 부흥군의 활약상을 엿볼 수 있었다. 벌처럼 모이고 고슴도치처럼 일어나 산과 골짜기에 가득 찼다.

 

노중국 교수 계명대 사학과

“근데 이게 어느 정도 되느냐 복신이나 도침이 부흥군을 일으킬 때 순식간에 3만 여명이 모였다. 또 2백여 성을 곧 회복을 했다. 일부 지방군들이 큰 타격을 입지 않고 여전히 전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개전 5일 만에 사비도성을 함락한 완벽한 군사작전 그러나 나?당연합군 지휘부는 의자왕을 놓치는 결정적인 전략실패를 했다. 백제는 지역을 5방으로 나누어서 방어체계를 구축했다. 연합군의 사비 직공으로 지방군 전력은 보존됐다. 의자왕의 전략 핵심은 지방군을 활용한 사비 포위전이었다.

 

나?당연합군에게 또 하나의 큰 위협은 18만 군대의 식량이다. 격렬한 전투 중에 사비 도성의 백제군 군량은 불타버렸다. 벼 수확은 두 달은 더 기다려야 한다. 유일한 방법은 신라에서 조달하는 방법이다. 이곳은 백제 진현성이 있었던 곳이다. 신라에서 오는 보급품은 이 진현성을 중심으로 백제 국경의 산성들을 통과해야 한다. 그러나 도성을 목표로 신속하게 진군해 온 탓으로 산성의 농성중인 백제 병력이 건재했고 이들은 연합군의 보급 통로를 봉쇄하게 된다.

 

서정석 교수 공주대 문화재 보존학과

“실제로 백제가 부흥운동을 일으킬 때 백제 군사가 이 진현성을 장악하고 있으므로 신라에서 부여에 보급품이 전달되지 않아서 부여에 주둔하고 있었던 당나라 군사가 굶주림에 지친 적이 있습니다. 당나라 군사를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천여 명이 웅진 도를 개통하기 위해서 웅진 동쪽 그러니까 지금의 대전으로 출동했다가 모두 몰사하기도 했는데 그만큼 보급품 전달에 중요한 위치가 이 진현성과 대전 동쪽지역이 되겠습니다.”

 

의자왕이 장기 농성전을 이끌고 있을 때 46세의 예식 장군은 웅진방령 즉 웅진방어사령부의 실질적인 최고 지휘관이었다. 그런데 의자왕은 항전 5일째인 660년 7월 18일 갑자기 항복하고 만다. 당시 연합군이 웅진을 공격하는 상황도 특별히 없다. 왜 항복했을까?

 

나?당연합군이 웅진성을 공격한 흔적도 없다. 그런데 의자왕은 항복한다. 충분히 항전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백제군에게 유리한 상황이었는데 왜 항복을 했던 것일까요. 과연 닷새 동안에 웅진성 안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예식진 대장군 묘지명에 탁본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占風異域 就日長安’ 이 아리송한 내용이 의자왕과 예식진 장군의 운명을 얄궂게 돌려놓습니다. 서기 660년 7월 18일 운명의 날. 웅진성의 대반전입니다.

 

 

 

계룡산 자락에 아슬아슬한 비탈에 자리한 고왕암. 의자왕의 명으로 백제 마지막 해에 지은 암자다. 암자의 뒤쪽엔 천연바위로 된 동굴이 있다. 백제 왕자 융이 피신했다 해서 융피굴이라고 부른다. 왜 이곳에 백제 왕자가 숨었던 것일까? 융피굴 전설이 사실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급박했던 상황의 증언이 아닐까.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의자왕이 항복하는 상황에 대해서 ‘의자왕 및 태자 효가 제 성주들과 함께 항복했다’5)라고 기록하고 신라 본기에는 ‘의자왕이 태자 및 웅진방령군을 이끌고 웅진성에서 나와 항복했다’6)고 돼 있다. 그리고 신당서에는 예식이 등장한다.

 

 

 

신당서보다 먼저 쓰인 구당서는 더 구체적이다. 구당서는 삼국사기보다 2백년 앞선 945년에 편찬됐다. 그런데 당시의 기록을 유심히 보면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가 있다. 왕이 항복하는 장면을 서술하는데 구당서 신당서 모두 의자왕이 주체가 아니고 부하인 예식이 주체로 돼 있었다.

 

노종국 교수

“중요한 사람 특히 왕이면 왕을 제일 앞세우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건과 관련되어 가지고는 아주 심화를 자세하게 사실은 쓸 수가 없는 것이죠. Outline만 쓰게 되어 집니다. 이럴 때 왕과 관련된 사람이 왕보다 먼저 나오게 된다하면 그것은 그 나름대로 뭔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고 그 이유가 뭔지를 탐색해야 하는 것이죠.”

 

 

 

 

의자왕의 항복기사 바로 뒤 융의 기사를 보자. 태자 융이 주체로 되어서 어색함이 없다. 예식을 주어로 기록한 것이 사관의 실수로 볼 수 없는 증거다. 중국 역사에 김일제란 인물이 있다. 김일제는 흉노 출신으로 한나라에 귀화하여 큰 공을 세웠다. 중국역사에선 이민족이 공을 세우면 항상 김일제에 비교한다. 중화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모범적인 이민족 사례가 바로 김일제다. 그런데 예식진의 묘지명엔 김일제의 공을 어찌 예식진의 공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라고 칭송하고 있다. 이민족의 모범인 김일제보다 더 극찬 받는 예식진. 그의 공적은 무엇이었을까?

 

바이근싱 교수 섬서사범대 사학과

“백제의 유민 중 부여융 그러니깐 백제의 태자가 마지막에 정3품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흑치상지 역시 마지막에 정3품관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문헌자료와 후대에 발견된 묘지명 중 당나라에서 공이 컸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정3품인 예식진의 묘지명에는 이런 쪽의 언급이 거의 없습니다.”

 

 

개방국가였던 당나라는 번장들 즉 이민족의 출세가 보장돼 있었다. 외국인이 입당해서 공을 세우면 공적을 세세하게 남긴다. 예식진과 같은 시기에 당에 건너온 백제 출신 흑치상지는 토번족 토벌에 큰 공을 세운다. 그의 비문엔 당나라에서 세운 공과 관직의 승격과정이 세세하게 나와 있다. 그러나 예식진은 공적과 관직의 경력도 없이 좌위위 대장군만 기록돼 있다. 예식진의 공적은 무엇이었을까?

 

민족사학자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의자왕의 항복 장면을 독특하게 서술했다. ‘웅진성의 수성 대장이 의자왕을 잡아 항복하라 하매 왕이 자결을 시도했지만 동맥이 끊이지 않아 당에 포로가 되어 묶이어 가니라’라고......

 

의자왕의 측근이 예식에게 잡혔다. 신채호 선생의 말뜻은 무엇일까?

다시 구당서의 기록을 보자. 의자왕 항복장면 기사에 어떤 암호가 숨겨져 있다는 느낌이다. ‘기대장예식 우장의자래항(其大將?植 又將義慈來降)’을 한자 한자 분석해 본다. 총 11자의 글자 중 명확하게 의미가 드러나는 ‘기대장예식’과 ‘의자’를 제외하면 ‘又將來降’ 넉자다. ‘來’는 오다. ‘又’는 또. ‘降’은 항복하다. 그러면 ‘將’만 남는다. 암호의 정체는 ‘將’. 그렇다. 모든 상황은 이 ‘將’이라는 글자에 정확히 담겨 있다. 그 대장 예식이 또 義慈왕을 將에 와서 항복했다. ‘將’은 무슨 뜻일까?

 

노중국 교수

“‘將’자에는 명사로는 ‘장수’라는 뜻도 있고 동사에는 ‘거느리다, 데리고 간다’라는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그 문장으로 봐서는 ‘將’은 동사로 봐야 됩니다. 그러면 예식이 의자왕을 데리고 가서 항복을 했다. 이렇게 되는 거죠. 이게 갖는 의미가 뭐냐 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예식장군이 의자왕을 데리고 가다’, ‘왕을 데리고 간다?’ 무슨 뜻일까?

 

이문기 교수

“의자왕을 감금내지 체로를 해서 당에 항복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김영관 관장

“의자왕을 사로잡아서 소장방에게 와서 항복을 한 것입니다. 결국 예식은 의자왕에게 대해서 반역을 한 것이고 백제에 대해서 반역을 한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將’ 데리고 간 것인가? 아니면 체포해 간 것인가?

취재진은 놀라운 결론에 신중해 질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문을 일상적으로 접하는 중국 역사학자에 분석을 들어보기로 했다.

 

바이근싱 교수

“예식이 그 왕을 데리고... 여기서 데리고는 왕을 사로잡아서 당나라에 투항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將’자가 중요한 것입니다. 전쟁에서 배신입니다.”

 

예식진 묘지명이 ‘장’이라는 글자를 살려냈다. 대당 좌위위 대장군 예식진. 그의 공적은 주군을 배신한 것이었다. 일촉즉발에 팽팽한 대치상황 나?당연합군에 의해 위압당한 예식진은 영달과 파멸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암호문 같았던 묘지명의 의미도 이제 뚜렷하게 드러났다. 이 상황을 비유적으로 표현해 놓은 것이었다. ‘점풍이역 취일장안’

 

노중국 교수

“점풍은 바람을 점친다. 바람이 어디로 갈거냐? 어디로 불거냐? 그는 백제지역에서 앞으로 자기의 거취. 거취라는 것은 ‘당한테 항복할 것이냐 아니면 저항할 거냐’ 이러했을 때 자기 나름대로 이제 점처봤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 계산을 했다는 말입니다.”

 

占風. 웅진성의 깊은 곳에선 이미 새로운 힘을 따르고 있었다. 그날 웅진성의 결정권자는 예식장군이었다. 660년 7월 18일 의자왕의 체포는 전투중지 명령이자, 백제 칠백년 역사의 끝이었다.

 

‘其大將?植 又將義慈來降’ 정말 충격적입니다. 항상 이런 위기의 순간에는 내부에 배신이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역설적으로 한반도에 삼국이 대립하고 있을 시절에는 당나라가 오히려 고전을 했습니다. 하지만 백제라는 한 축이 무너진 이후에는 불과 8년 뒤인 668년 신라의 지원을 받은 당나라군에 의해서 고구려도 쉽게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결국 예식진의 배신행위는 동북아의 거대한 주춧돌 하나를 뽑아 버린 셈이 됐습니다. 이 이후로 동북아의 국제 질서는 중국 중심으로 고착화 됩니다.

 

 

부여 고란사에는 삼천궁녀의 최후를 받은 벽화가 있다. 나?당연합군에 쫓겨 낙화암에서 뛰어든 궁녀들 그러나 삼천궁녀의 이야기는 후대의 문인들이 지어낸 허구일 뿐이었다. 그것은 망국의 왕이 짊어 줘야 할 숙명이었다.7) 의자왕은 당에 끌려와 곧바로 배신의 응어리를 안고 북망산의 고혼이 되었다. 의자왕의 측근에서 당황제의 충신으로 변신하여 화려한 삶을 산 예식진. 그에겐 대당 좌위위 대장군 그것이 조국 백제보다 소중했다.

 

 

묘지명은 그에 대한 화려했던 당황제의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 672년 12년의 짧은 기간 동안 당에서의 영화를 뒤로 하고 예식진은 58세로 사망한다. 황제는 조칙을 내려 최후의 예후로 고위 관료들이 묻히는 고엔위안에 그를 안장했다.

 

 

  

지난 2000년 중국 북망산에서 가져온 흙으로 1340년 만에 전쟁포로였던 백제 의자왕의 고혼을 안치해 와 부여 능산리에 안장했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 주군을 등졌던 예식진. 그에게도 한 점 회한이 남아 있었을까? 예식진의 묘지명은 오늘 의자왕의 오욕을 벗겨주고 있다.

 

오늘 역사추적은 이처럼 예식진이라는 인물의 묘지명을 통해서 무려 1348년 동안이나 까마득하게 무쳐져 있었던 역사의 진실 그 한 단면을 확인했습니다. 물론 예식전 묘지명에 정확한 의미는 앞으로도 연구가 계속돼야 할 역사학계의 과제일 겁니다. 제가 지금 서 있는 곳은 북망산에 고혼이 된 의자왕의 가묘입니다. 내리는 눈발이 마치 의자왕의 누명을 벗겨주는 서설 같습니다. 오늘 역사추적이 모든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역사에 조롱거리가 돼 왔던 의자왕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에 첫걸음이 됐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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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은 KBS <역사추적>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업적인 용도로 사용을 금합니다.

 

주)

1) 일본서기 제명천황 편.

2) 新唐書 소정방 열전.

3) 660년 7월 13일 사비도성 함락.

4) ‘王幸熊津城’ 삼국사기.

5) ‘王及太子孝與諸城皆降’ 삼국사기 백제본기

6) ‘義慈率 太子及雄鎭方領軍等’ 삼국사기 신라본기

7) 660년 9월 3일 의자왕은 당나라로 압송 당함.

 

꼬리말

이 방송을 보면서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의자왕은 백제를 멸망시키게 한 주범이라 생각을 했었는데 예식진의 묘지명을 통해 백제의 멸망을 시킨 주범은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역사추적을 통해 지금까지 잘못 알고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바로 잡았다고 할까요. 너무 섣부른 결정인가요. 앞으로 의자왕의 대한 연구가 더 되어야겠지만 의자왕이 지금껏 뒤집어썼던 오욕을 벗기엔 충분했다고 봅니다. <역사추적>을 통해 더 많은 잘못된 역사적 사실을 밝혀지기를 바라면서 다시 한 번 KBS <역사추적> 제작팀께 감사함을 전합니다.

 

 

 

 

 

 

 

 

 

 

 

 

 

 

 

 

 

일본어 ‘나라’는 한국어 ‘국가’라는 뜻

독서신문 / 2009 - 06 - 22 [08:59]

 

홍윤기 박사의 『일본 속의 백제 나라』

 

▲ 홍윤기 교수     © 독서신문


한국과 일본. 이 두 나라를 지칭할 때마다 늘 빼놓지 않고 사용되는 수식어는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말이다. 이는 그만큼 한국과 일본이 지리상 근접성은 가까울지라도 심리적인 거리는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곳에 있는 먼 존재임을 암시하는 말일테다.

백제(百濟) 왕이 왜왕(倭王) 지(旨)에게 하사한 철제(鐵製) 칼 ‘칠지도’에 대한 일본의 왜곡, 일제치하시대를 거친 한국에 대한 일본의 태도 등 모든 것이 조금은 ‘어색한’ 한국과 일본은 아직은 해결해야 할 것이 많은 사이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일본어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다른 나라 말보다 일본어는 한국 사람들이 비교적 쉽게 다가갈 수 있다고 한다. 어순도 비슷하고 발음이 비슷한 것도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들의 설명인데 홍 박사의 책은 이러한 모습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지난번 『일본 속의 백제, 구다라』를 펴낸 바 있는 홍윤기 박사가 이번에 『일본 속의 백제 나라』를 새로 발간하면서 이처럼 일본어에 한국어가 왜 이렇게 많이 섞여 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에 의하면 일본말에는 ‘나라’를 비롯해 ‘구다라’ 또는 ‘데라’, ‘차’, ‘바지’ 등 우리 한국어가 많이 들어있다고 한다. ‘나라’라는 말은 우리 한국어로는 ‘국가’라는 뜻인데 일본에서는 옛날 일본의 왕들이 살던 도읍지인 ‘왕도’를 가리켜 한국어의 ‘나라’라고 불렀다는 것이 홍 박사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일본 왕들이 살던 도읍지를 한국어의 ‘나라’라고 불렀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일까.
                                                                                                                                                   

▲     ©독서신문


그의 저서에 의하면 현재 일본 왕실에서는 해마다 11월 23일 초저녁에 ‘니나메사이’라는 왕실제사를 행한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이 ‘니나메사이’ 왕실 제사는 ‘가스가 마쓰리’ 제사의 형식과 내용이 똑같다는 것이다. ‘가스가 마쓰리’는 백제 왕족인 후지와라 가문과 관련이 있는데 ‘후지와라노 가마타리’의 부인이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 나라 땅에 직접 불교 사찰 고후쿠지에서 지낸 춘일제 제사를 의미한다. [연중행사사전]에는 이 제사에 대해 “후지와라 가문의 큰 제사여서 성대하게 거행하며 반드시 일본 왕실의 조정에서 칙사로서 가스가사를 제사지내는 사당에 보내 신주에게 폐를 바쳤다”고 쓰여있을 만큼 중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재 거행되는 ‘니나메사이’에는 일왕이 직접 제주로서 왕실의 궁중삼전의 제사 전당에 참석하며 여기서 백제신 신주를 모셔오는 축문인 ‘가라카미’를 낭창하는데 그 내용이 결정적이다.

“나 한신(韓信)은 한(韓)을 모셔오노라, 한(韓)을, 한(韓)을 모셔오노라”는 것이 축문의 첫머리 부분인데 우에다 마사아키 교토대학 사학과 교수는 “일본 왕실 궁중 제사에서 모시는 한신(韓信)은 ‘백제신’이다”라고 밝혔다.

또한 더욱 놀라운 점은 ‘니나메사이’, ‘가스가 마쓰리’와 더불어 소위 삼위일체를 이루고 있다고 일컬음을 받는 일본 왕실의 궁중제사는 백제신 제사인 ‘한신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홍윤기 박사가 발간한 이번 책의 아주 일부에 불과하며 이 외에도 ‘백제인 세도가 후지와라 가문이 세운 고대 명찰인 홍복사’와 ‘백제 왕족 스이코 여왕이 창건한 나라땅 백제대사의 후신인 대안사’에 대한 이야기도 언급하고 있다.

이와 함께 저자가 직접 일본 현지에가서 찍은 사진들과 보다 쉬운 이해를 돕는 다양한 사진은 양질의 콘텐츠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황정은 기자  

 

출처 : 정경뉴스 2004년 2월호















 


 

 

잊혀진 땅 - 백제 22담로의 비밀 (1/2)

  

 

서기 523년 5월 왕을 돌아가셨다. 그 죽음과 함께 위대했던 왕의 시대는 길고 긴 어둠에 묻혔다.  왕의 나라와 그 나라의 역사 또한 세월의 비바람 속에 까맣게 잊혀졌다.

1971년 왕릉이 다시 열렸을 때 1400년의 어둠을 뚫고 비로소 왕의 이름은 현실 속에 되살아났다. 백제 25대왕 무령왕의 릉이었다. 왕릉은 그대로 하나의 강력한 證言語있다. 왕이 다스린 나라. 사라져버린 나라. 그러나 강성했던 나라 백제의 실체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백제는 약소국이 아니었다. 놀라운 해상능력을 바탕으로 고대동아시아의 국제무대를 누볐던 강국이었다.

 

정치외교의 주역이었으며, 무역으로 국부를 쌓았던 백제. 그 백제인들의 영역은 한반도의 경계를 넘어설 수도 있었다. 그 가능성을 여는 열쇠가 바로 담로였다.  백제가 다스렸다는 땅 22개의 담로.

역사는 우리에게 묻는다. 백제는 진실로 어떤 나라였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는 삼국 중에서도 가장 왜소한 모습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종종 영토의 크기를 국력의 크기로 인식하곤 한다. 작가 고원정.

 

바로 이러한 시기 백제는 작고 힘없는 나라로 인식되어온 것이다. 해묵은 고정관념의 안경을 끼고 볼 때 이러한 백제가 광대한 해외 영토를 경영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상상에 지나지 않는 듯 하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오늘 우리는 다시 한번 백제사의 미스터리 속으로 들어가 보려고 한다.

 

일본 큐슈 산림지대에 미야자키현에 작은 마을 난고촌이 자리잡고 있다. 전체 인구를 통틀어도 3000명에 지나지 않는 산골 마을 난고촌. 그러나 오늘 마을은 왠지 예사롭지 않다. 찾아드는 외지인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 속에는 한국인들의 모습도 보인다. 초청한 인사들의 이름표 속에도 한국식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이 행사가 대체 한국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것일까. 오늘 이 자리는 거대한 새 건축물의 완공을 축하하는 자리다. 6년간의 세월과 15억 엔이라는 엄청난 예산을 들여 지은 집. 이름하여 '정창원'. 나라에 있는 옛 정창원을 그대로 본떠 지은 집이다. 그 개원식에 한국인들이 중요한 손님으로 초대받은 것이다.

 

마을에서는 간판조차 모두 한글로 쓰여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흔한 것이 백제라는 이름이다.  난고촌 사람들은 놀랍게도 자신들의 마을을 스스로 백제마을이라 일컫고 있는 것이다.
 
 

마을의 젊은이들은 백제의 후예를 자처하면서 한국의 사물놀이까지 몸으로 익히고 있다.
 
난고촌 미카도 신사.
 
 
 
이 곳 미카도 신사에 그들이 신으로 모시고 있는 사람은 바로 백제 왕이다.
전설은 이렇게 전한다.

'1300년전 백제가 멸망하고 얼마 뒤 정가왕이라는 백제왕이 난을 피해 큐슈로 오던 중 폭풍우를 만났다. 정가왕의 배는 육지에 닿았고, 왕은 이곳 난고촌에 와 정착했다.'

정가왕의 장남 복지왕이 타고 있었던 또 한척의 배.  그 배는 다른 해안에 표착했고 복지왕은 난고촌에서 남쪽으로 약 90km 떨어진 이 지역 오늘날의 기조정에 터를 잡았다.

 

이곳 히키신사에 모시고 있는 신주가 바로 복지왕이다.
이 신사에 전해 내려오는 고문서. 여기에 정가왕과 복지왕의 전설이 그대로 기록으로 남아 있다.  두 부자는 서로의 행방을 알게 된 후에도 각자의 터전을 지키며 살았다.
 
 

그러나 그들의 뒤를 쫓는 추격군이 이곳 난고촌에 들어왔고, 복지왕이 달려가 부왕 정가왕을 도왔으나 그들은 결국 난고촌 뒷산까지 밀려나 최후를 맞는다. 난고촌 사람들은 바로 이 돌밭이 두 왕이 피를 흘리며 전사한 곳이라 굳게 믿고 있다. 왕이 흘린 피가 이 돌들을 붉게 물들렸다는 것이다.

난고촌 입구에는 정가왕의 시신을 거두어 묻었다는 무덤자리마저 전해지고 있다.
 
 

매년 12월이면 난고촌과 기조정 사람들은 함께 맞지리를 펼친다. 아들 복지왕이 아버지 정가왕을 뵈러가는 행차를 재현하고, 그들의 혼백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두 마을 사람들의 맞지리 속에 1300여년 간 백제왕의 전설이 전해져왔다. 그렇다고 해도 전설은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이었다.
 
 

그런데 6년전 정가왕 신사에서 그 전설의 신빙성을 증명하는 놀라운 유물들이 발견됐다. 4~7세기를 망라하는 고대 청동거울이 33개나 쏟아져 나왔다.

 

<소진철 교수> 고대의 거울은 강력한 왕권의 상징이다. 이러한 것들이 백제왕 신사에서 33장이나 나왔다고 하는 사실은 여기 왔다는 정가왕은 물론이고 그 이전부터 이직에는 강력한 백제계 세력이 세습적으로 존재했을 가능성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이곳에는 분명 오랜 역사를 지닌 어떤 권력의 실체가 있었던 것이다.  이 거울들을 보관하기 위해서 난고촌 사람들은 서정창원을 건립했다. 그렇게 많은 거울을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었던 세력집단 그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미야자키현 다노정.

난고촌과 기조정 말고도 이 일대는 백제왕이 왔다는 전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또 다른 백제왕은 이 산길을 걸어갔다.

기조정에서 남쪽으로 약 50km. 사람들이 왕의 일행을 맞았다는 장소엔 어김없이 작은 사당이 모셔져 있다.  오늘날 까지도 이 앞을 지나는 그 신성을 믿는 이들은 술과 돈과 예를 바치고 지나간다.

 

마을의 외곽에는 왕의 죽음을 알리는 돌비석도 하나 서 있다. 어느 날 왕은 말을 달리다 바로 이곳에 있었던 우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왕이 살았다는 마을 다노정. 이제까지 그것은 전설이었다. 그러나 2년전 센켄신사에서 하나의 문서가 발견됐다.
 
 

난고촌의 예를 보고 마을 사람들이 신사의 창고를 뒤져 찾아낸 것이었다.
문서에는 백제왕의 도래 사실이 뚜렷이 기록돼 있었다.

백제 왕족이 분명한 그들은 왜 하필 이쪽으로 몰려온 것일까?
센켄의 기록에 따르면 과거에 이곳은 일향이란 나라의 영역이었다.  그것은 일본서기에 최초로 등장하는 나라의 이름이기도 하다. 일향(日向)의 나라(國)...日向國.
 
 

이 일대야 말로 일본이 처음 시작된 곳으로 알려진 지역이며, 일본 열도에서 가장 오랜 인류의 흔적이 남아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일향시 일원은 옛 일향의 권역. 백제 왕의 전설을 담고 있는 마을들은 모두 그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일본 서기 신대기는 이 지역을 처음 개척한 사람이 백제인일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신으로 기록된 그 이름은 스사노노 미코토. 그의 원적지는 웅성이었다. 웅성을 일본말로 읽으면 구마나이, 곧 곰나루로 백제의 도읍 웅진을 뜻하게 된다. 그는 곰나루에서 배를 타고 이곳으로 건너왔다.  미개지 왜 땅에서 그가 제일먼저 한 일은 나무를 심은 것이었다. 한반도를 오갈 배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이 지역 고분에서 발굴된 고대 토기는 전형적인 한국 선(배)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이 지역에는 실로 오래 전부터 백제인들이 진출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백제의 왕족들이 이곳으로 찾아 들 수 있었던 것을 과연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땅이 있고 사람이 있고 통치하는 왕권이 있었다. 중국 사서인 양서는 이 지역 성격에 대해 하나의 단서를 던져준다. 왕족을 파견하여 백제 고유의 담로를 다스리게 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기록은 이렇게 전한다.
 
'백제 왕성은 '고마', 큰 성은 '담로'라여 22개의 담로를 모두 왕의 자제나 종족으로 하여 다스리게 했다.' 
일본 내의 백제 담로. 그곳은 백제의 왕족의 마지막 도피처가 되기에 적합했을 것이다.
백제는 담로라는 독특한 지방 통치제제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백제의 왕은 수 많은 담로의 왕들을 거느린 제왕의 위치에 있었다는 얘기다.

백제의 영토를 알려줄 담로들은 과연 어디에 위치해 있었을까?
우리는 일본 신화시대의 '일향'이라는 지명이 오늘날 까지 남아있는 예를 보았다. 지명의 생명력이 놀랄만큼 길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담로라는 지명 또한 어딘가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을 법하다. 그 흔적을 찾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먼저 담로란 말의 뜻부터 알아보자.

<김성호 박사> 담로의 어원을 추적하자면 고구려에서부터 시작한다. 고구려에서는 빼앗은 땅, 점령지 다모리라 했다.  백제인들의 정착지도 다모리라했다. 이 다모리 다물, 담라, 담로로 변천했다. '담'은 담장 또는 경계를 뜻하고 '로'는 나라는 뜻한다. 이 말은 백제의 행정구역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다물이란 도대체 무슨 뜻일까? 담의 유래를 다물에서 찾는다면 타당한 것일까.  이점을 시사해주는 단서가 있다.

 

전남 해안이나 도서 지방에는 밭두렁에 돌담을 쌓아놓는데 이것을 다모리라고 한다. 여기는 백제의 옛 영토였다. 이 다모리가 다물로 바뀌고 현재는 담으로 변했는데 다물은 성을 뜻하기도 하는데, 새로 개척해서 담을 두른 영지(정복지)를 다물이라고 한다.

한반도에는 담로를 뜻하는 여러 지명들이 제주도까지 걸쳐 남아있다.
일본 열도의 가당도는 백제 무령왕이 태어난 곳이다. 여기에도 다마나라는 담로계 지명이 남아 있다.
큐슈 다마나시. 다마나는 탐라, 담로와 같은 전형적인 담로계 지명이다.

부근에 구마모토, 구마 즉 곰을 뜻하는 지명은 백제 왕성을 뜻하는 말이다. 곰은 백제의 상징이었다. 백제와 관련된 유적에는 곰과 관련된 지명이 발견된다. 한국의 금강의 어원은 곰강이다. 이곳에 구마천(곰강)이 흐르고 있다. 한반도 금강 상류에는 곰나루를 뜻하는 웅진이 있고, 그 하류에는 또 다른 곰마을 웅포가 있었는데 모두 왕급의 유물이 발견됐다.

 

구다라, 이것은 일본에서 백제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 마을에는 구다라기라는 국민학교가 있다. 그 이전에도 이 학교는 구다라기 국민학교였는데 소리만 두고 한자를 바꾼 것이었다. 가장 오래된 이름은 백제래였다. 즉 백제가 왔다는 뜻이다.
 
 

이 마을에 온 것은 백제 달솔 일라였다. 달솔은 지금의 장관급으로 본토 백제의 고위 관리가 이 마을에 파견돼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 본토백제의 통치력이 직접 미쳤다는 얘기다.

후나야마고분(전방후원분)은 다마나 일대를 담로로 추정할 수 있는 강력한 고고학적 증거를 제시한다.

 

이 고분은 5세기 경으로 추정되며, 일본 최고 최대의 유물들이 발굴됐다. 무덤의 내부는 백제의 대표적 묘제로 알려진 횡혈식 석실 구조이다. 여기서 나온 유물들의 주인이 극히 고귀한 신분임을 말해준다.

명문이 새겨진 대도
은상감의 명문이 새겨진 이 큰칼은 지배층만이 가지는 권력의 상징이다.
후나야마 출토품은 백제의 왕릉급 출토품과 놀랍도록 흡사하다.

 

이 고분의 주인은 백제 왕족이 분명한 것이다. 이 무덤은 전방후원 형태를 위하고 있는 이 무덤 양식의 초기 원형은 한반도 일대에서 찾을 수 있다.

혼슈의 아스카 지역은 일본의 대표적인 전방후원분 밀집지역이다.

 

<강인구 교수> 한반도의 전방후원분은 일본의 것보다 더 초기형이며, 그 기원은 한반도이다. 한반도에서 큐슈로, 큐슈에서 아스카 지역으로 건너간 것이다.

아스카베 신사는 곤지왕을 모시고 있다. 곤지왕은 백제 개로왕의 동생으로 5세기의 인물이다. 일본땅에서 곤지는 신으로 추앙되고 있다.

 

아스카베 신사는 곤지를 일컬어 아스카를 이룬 일족의 조상신이라고 말하고 있다. 일본이라는 통일 국가가 있기 전에 먼저 곤지의 일족이 아스카를 개척했다는 뜻이다. 
곤지왕의 신사는 아스카 지역이 백제의 담로였음을 강하게 시사하는 것이다. 이곳은 백제인과 백제의 왕이 있었던 곳이며, 후에 백제 24대, 25대 왕(곤지의 두 아들)을 배출한 곳이다.

 

백제 25대 사마왕, 그가 바로 무령왕이다. 무령왕은 곤지가 왜 열도로 가던 도중 낳은 아들이었다.  24대 동성왕은 무령왕의 동생이다. 아스카는 이 두 왕이 성장한 곳이다. 이것은 본국 백제와 담로가 하나의 정치체제 속에 통합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담로는 백제의 일부분인 것이다.

미네가즈카 고분(아스카, 전방후원분). 이 고분은 전 일본 열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미네가즈카 고분은 천황릉인가?
여기서서 출토된 유물들은 미네가즈카 고분의 주인공이 백제인이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무령왕의 유물과 재질, 형태까지 똑같은 유물들이 출토됐다.

일본서기에는 이것에 관한 해답이 될만한 천지장조 신화가 적혀있다.

 

신화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음양 두 신이 결합하여 부부가 됐다. 자식을 낳을 때에 이르러 맨 처음 담로를 모태로 하여 여러 땅을 낳았다. 그런데 기분이 나빠 담로의 이름을 미와지시마로 했다.'
일본의 천지창조는 담로로부터 시작했던 것이다.
즉, 일본이라는 나라가 있기 전에 일본 땅에는 이미 백제인이 담로를 형성하며 진출해 있었다는 것이다. 

 

 

 

잊혀진 땅 - 백제 22담로의 비밀 (2/2)

  

488년 ~ 498년까지 총 10여년간 화북평원을 두고 일어난 백제와 위나라 사이의 전쟁.

 

서기 246년 위나라의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략하여 수도 환도성에 쳐들어오자,

이 때 백제는 유주(幽州)가 비어있는 틈을 타, 장 진충에게 그 곳을 치도록하여 지금의 북경과 천진 지역에 백제군을 설치하였다. 

(윤내현 교수님의 '우리 고대사 상상에서 현실로에서')

 

기록을 보면,

 

-송서-

 

백제자 후점강대 겸제지국
百濟者 後漸强大 兼諸小國

기국 본여구려 재요동지동 진세 구려기략유요서
其國 本與句麗 在遼東之東 晋世 句麗旣略有遼東

백제전거유요서진평이군의
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地矣

금유성북평지간
今柳城北平之間

자치백제군
自治百濟郡

"백제라고 하는 나라는 후에 점정 강하고 커져서 여러 작은 나라를 병합하고

그 나라가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에 있었는데 진나라 때 (3세기 중엽)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점령하고

백제 역시 요서진평의 2군을 점령하니 지금의 유성과 북평 사이로다"

 

이 진평 2군은 단재 신채호 선생님께서 지은 저서 "조선상고사"에도 등장한다.

"근구수가 기원 375년에 즉위하여 재위하여 재위 10년 동안에 고구려에 대하여는

겨우 1차 평양의 침입만 있었으나 바다를 건너 지나대륙을 경략하여,

선비 모용씨(鮮卑 慕容氏)의 연(燕)과 부씨( 氏)의 진(秦)을 정벌,

금 요서.산동.강소.절강(今 遼西.山東.江蘇.浙江) 등지를 경략하여 광대한 토지를 장만하였다."

 

그런데, 남제서를 보면,

 

是歲, <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 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解禮昆>·<木干那>率衆襲擊虜軍, 大破之. <建武>二年, <牟大>遣

使上表曰: [臣自昔受封, 世被朝榮, 荷節鉞, 剋攘列酸. 往<姐瑾>等竝蒙光除, 臣庶咸泰. 去庚午年, < >弗悛, 擧兵深逼. 臣遣<沙法名>等

領軍逆討, 宵襲霆擊, <匈>梨張惶,/$[梨]南監本作[ ].《漢書》[匈奴傳], 其國稱單于曰 ?孤塗單于. <匈奴>謂天爲 ?, 謂子爲孤塗, 單于

者, 廣大之貌也. <匈>?猶言<匈奴>單于, ??通.$/ 崩若海蕩. 乘奔追斬, 尸丹野. 由是 其銳氣, 鯨暴韜凶. 今邦宇謐靜, 實<名>等之略, 尋其

功勳, 宜在 顯. 今假<沙法名>行征虜將軍·<邁羅王>, 爲行安國將軍·<酸中王>, <解禮昆>爲行武威將軍·<弗中侯>, <木干那>前有軍功, 又

拔臺舫, 爲行廣威將軍·<面中侯>. 伏願天恩特愍聽除.] 又表曰: [臣所遣行龍 將軍·<樂浪>太守兼長史臣<慕遺>, 行建武將軍·<城陽>太守

兼司馬臣<王茂>, 兼參軍·行振武將軍·<朝鮮>太守臣<張塞>, 行揚武將軍<陳明>, 在官忘私, 唯公是務, 見危授命, 蹈難弗顧. 今任臣使, 冒

涉波險, 盡其至誠. 實宜進爵, 各假行署. 伏願聖朝特賜除正.] 詔可, 竝賜軍號.

이 해에 '위노'가 기병 수십만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그 경계에 들어가니,

'모대'가 장수 <사법명>··<해례곤>·<목간나>를 보내어 '노'군을 공격하여 크게 이를 깨뜨렸다.

'건무'이년 '모대'가 사신을 보내어 표를 올려 말하길 신은 옛부터 봉함을 받아 대대로 조정의 영화를 입고,

절과 부인 분에 넘치는 것을 받아 오랑캐를 물리치었습니다. '저근'등이 가서 광택을 입고, 신은 두루 평안합니다.

경오년에 가서 '험윤'이 깨닫지 못하고, 병사를 내어 깊이 쳐들어 오니, 신이 '사법명'등 군사로 토벌하고, 야간에 번개같이 엄습하니 '흉'의 이장이 두려워 하고 무너저 바다로 쓸어버렸다. 달아나는 것을 베어 죽은 시체가 들을 붉게 물들였다.

이로 말미암아 그 예기를 꺽으니, 흉폭함을 잡았다. 이제 나라가 조용해지니 실로 '명'등의 다스림이니, 그 공훈을 생각하여 칭찬함이 마땅하다.

이제 '사법명'을 행정로장군 매라왕으로 삼고, '?수류'는 행안국장군 벽중왕으로 삼고,

'해례곤'은 행무위장군 불중후, '목간나'는 전의 무공이 있고 또한 대방을 빼앗으니 행광위장군 면중왕으로 삼으소서.

업드려 원하니 하늘의 은혜로 청을 들어 주옵소소 하였다.

또 표에 말하길, 신이 행용양장군 낙랑태수 겸 장사인 신 '모유', 행건무장군 성양태수 겸 사마인 신 '왕무', 겸 참군이고 행진무장군 조선태수 인 신 '장색', 행양무장군 '진명'은 관직에 있어 사사로움을 버리고, 오직 공무에만 힘쓰며, 위급함에 명을 받들어 어려움을 물리치고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이 인신이 사신으로 보내어, 험한 물결을 무릅쓰고 나아가니 정성이 지극합니다.

실로 작위를 내림이 마땅하니 각각 베풀어 주십시오.

업드려 올바른 제수가 있기를 원하옵니다 하니 조서를 내려 옳다 하고 군호를 내리었다.

 

백제와 북위의 전쟁의 승자는 백제였고, 백제는 이 결과로 영토를 확장하였다.

당시 남제에 보낸 국서를 읽어보면, 다수의 왕과 장군의 직책을 설치하여

남제에 통고하였는데, 이들이 관할한 지역은 모두 양자강 근처에 존재하는 지역이다.

실제 <<남제서>>에서는 '據江左右'라는 네 자가 보이는데, 이는 '양자강 좌우에 근거지를 마련하였다'는 의미이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남제서>>는 "이로부터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하였다.

 

북위와 백제의 전쟁은 488년 ~ 498년까지 10년간 5차례 이루어졌으며

백제와 북위는 당시 최고의 옥토였던 "화북평원"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하나 모두 백제의 승리로 끝났다.

 

이 내용으로 보아 백제는 대륙 땅을 정복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영토를 짐작해볼까요?

  

중국 제나라의 역사서 '남제서' 백제전에는 이상한 전쟁의 기록이 남아있다.

 

'위나라는 기병 수십만을 동원해서 백제를 공격하여 그 국경안으로 쳐들어갔다.

동성왕은 사법령, 찬수류, 해려곤, 목간나 등을 보내 위나라 군을 습격하여 대파했다.'


백제의 영토가 한반도 남서부로 국한했을 경우, 위나라가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선

바다와 고구려의 영토를 지나서 백제를 공격하는 것인데 이는 둘다 성립하기 어렵다.

첫째, 위나라 군사는 수군이 아닌 기병이었고,

둘째, 강성했던 고구려가 위나라 군사에게 길을 내줄리 만무했으며 그런 기록도 없다.

따라서 이 전쟁이 가능하려면 백제와 위나라은 서로 국경을 맞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즉 중국 대륙에 백제의 영토가 있었다는 얘기다.


중국 북경 도서관.

삼국사기에서는 백제의 중국 대륙 진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중극 측의 백제 관련 기록은 송서, 남제서, 양서 등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이들 사서의 기록에는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했고, 백제 역시 진평, 요서 2개의 땅을 빼앗아 다스리면서 그곳에 백제군을 설치했다.'고 전한다.

 

<진가위 교수> 사서에는 '요서'는 '유성'과 '북평'의 사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유성과 북평은 1천년 전의 지명이다. 중국 사회과학원 역사지리학자에 의하면 유성은 현재의 요녕성 조양시이다.

북평군은 현재의 하북성 노령시이다.


기록에 의하여 추정한 요서의 위치.

 

그 곳은 현재 요녕성과 하북성 일대 발해만 연안의 광활한 지역이다.

중국 역사서에는 중국 지명을 직명으로 가진 수많은 백제 태수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이들은 중국 동부 해안지역의 태수들이다.

 

<윤내현 교수> '고대 중국 동부 해안지역에는 동이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래서 고조선이 건국되기 이전부터 동이족은 우리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이런 점에서 우리 민족이 이곳에 진출할 수 있었던 기반은 이미 마련돼 있었다.

그런데 백제가 중국에 진출할 시기에는 중국이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여러 왕조가 흥망을 거듭하는 시기였고, 북방의 민족이 중국에 왕조를 세우고 흥망이 반복되던 시기였다.

따라서 이런 혼란기에 백제가 중국 동부 지역에 진출한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중국 중앙민족대학.

 

<황유복 교수> '백제가 진평군을 경략했다는 기록이 제일 처음 나오는 기록이 송서이다.

이때 마침 송나라때 진평군을 설치했다는 기록은 지금의 요서지역이 아니라 지금의 남방에 있는 광서지역이다.

광서 남령에서 동남쪽으로 내려오면 그 지역이 진평군의 소재지였다.'

 

광서 장족 자치구의 모든 마을 이름이 모두 수록된 행정구역자료열람.

 

그 속에 선명한 하나의 이름이 있었다. 백제향이었다.  백제향의 중심지는 백제허.

허는 유적지. 그 말 뜻대로라면 이 지역은 백제의 유적지라는 얘기가 된다.  

백제허를 중국어로 읽으면 '다이쯔쉬' 그런데 그 곳 주민들은 자신들의 마을 이릉을 '대백제' 또는 '대박제'라고 부른다.


남령에서는 백제허를 오가는 정기 시외버스가 있다.

 

남령으로부터 3시간, 백제허가 거기 있었다. 그러나 옛성의 흔적은 없고 중국의 시골풍경만 남아 있다.

이들은 한족도 남방계 민족도 아닌 장족이다.

낯익은 나즈막한 부뚜막은 입식 구조의 중국인의 부엌과는 확연하게 다른 것이다.

한 옆에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았다는 멧돌이 있었다.

이것은 흔한 것이 아니며 한반도의 전라도 멧돌과 꼭 닮아있다.

 

 

다른 집에는 외다리 방아가 있다. 우리나라 전역에서는 쌍다리 방아를 썼다.

외다리 방아는 오직 전라도 지방과 일본지역에서만 전승되어온 것이었다.

이들 지역은 바로 백제권이다. 백제허의 사람들은 백제권의 생활문화를 편륜으로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누구일까?

 

 

<육태정 (81)> 언제인지는 모르나 아주 오래전에 산동 지방에서 왔다고 한다.

산동 지역에서 왜 왔는가? 옛날에 장사하러 왔다는 이야기가 있고, 또 전쟁 때문에 왔다는 전설도 있다.

 

정월 대보름 불렀다는 노래. 사람들은 그 노래 뜻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래는 1000년을 그들 속에 살아있었다.  

그 노래의 주인이야말로 산동 지역에서 백제허로 온 주역이었는지도 모른다.

 

 

백제의 담로는 중국의 동부해안을 따라 베트남 접경지대인 진평군까지 남하하고 있는 것이다.

백제가 여기까지 올수 있었다면, 인접한 동남아 지역에서 담록의 지명이 발견되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닌 것이다.

 

동남아에도 담로가 있었을까?

그 가능성에 대한 증거가 남경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백제 달솔이었던 흑치상지의 묘지명이다.

 

 

묘지석엔 이렇게 전하고있다. '흑치상지는 원래 성씨가 왕의 성씨인 부여씨였으나,

선조가 흑치에 봉해짐으로써 그 성씨를 흑치로 삼았다'는 것.

흑치는 어디인가?

흑치는 이빨은 검은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이는 '띨랑'이라는 열대 과일을 씹는 습관 때문이다.

흑치의 선조가 봉해졌다는 땅은 무더운 남방의 땅이었다.

백제의 활동무대는 그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백제의 국호를 다시 한번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수나라 역사서에는 백제를 일컬어 '동이강국'이라고 했으며, 건국초부터 백가재해했다고 하여 국호를 백제라 했다고 한다.

백가제해(白家濟海)는 백가가 바다를 제패했다는 뜻이다.

백제는 결코 약한 나라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백제는 바다를 제패한 대제국이었다.

 

 

이렇게 거대한 해양제국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망했을까?

 

일본서기 천지전황기.

 

 서기663년 '백제의 최후 거점인 주휴성마저 함락되자 일본 땅의 조신들이 이렇게 탄식했다.

 주휴성이 함락됐으니 이를 어찌하랴.

백제의  이름이 오늘로서 끊겼으니 선조의 무덤을 어찌 오간단 말인가'라고 했다고 한다.

일본 땅에서 백제는 본국이었다.

서기 670년 왜 열도는 '일본'이란 국호로 새롭게 태어난다.

 

통전에는 이렇게 전한다.

 

본국백제가 멸망하자 성과 본국 근처에 있던 나머지 무리들은 차츰 약해져서 돌궐과 말갈로 흩어졌다.

그 군주인 부여순도 고국에 돌아갈 수 없음으로 하여 마침내 부여씨는 소멸됐다.

백제 700년 역사, 그 장엄했던 백제는 그렇게 어둠의 저편으로 저물어 갔다.

 

난고촌과 기조정의 사람들은 해마다 12월 이 신성한 바다에서 맞지리를 시작한다.

기조정 사람들이 아버지 정가왕의 신주를 모시고 난고촌까지 걸어갔다.

두 왕에게 아흐레 밤동안 가장 아름다운 술과 노래를 바쳤다.

 

 

헤어지는 날 아침이면 으레 두 마을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에 검정칠을 한다.

망국의 왕에게는 얼굴을 숨겨야하는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겁은 사라지고 검정칠은 즐거운 유희가 됐다.

헤어질때 그들의 인사는 '오 사라바'. 

그들은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한국어로는 명백한 '살아버'라는 말.

 

 

그 속에 백제는 아직도 살아 있다.

 

역사는 어딘가에 그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다.

 

 

중국사서에는 좌현왕, 우현왕, 면중왕, 부한왕, 벽중왕, 장사왕 같은 백제왕의 이름이라고는 하지만

정통 백제왕계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이름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백제 담로를 다스리는 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이 통치했던 영토는 중국 동부해안과 일본 땅 어쩌면 동남아시아 땅에까지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한반도라는 좁은 틀 안에 우리 스스로 역사를 가두어 버리지 않는다면,

모든 가능성을 스스로 봉쇄해 버리지 않는다면,

이제 우리는 백제사의 새로운 지평을 바라볼 수 있다.

그것은 곧 우리 정신의 지평을 넓히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당나라를 정복하라! 고구려의 후예들 발해와 제나라 & 무도·무예·무술의 전파 교류 클릭참조>>

제주도, 만주, 오키나와 등 여러 지역의 유물, 유적 등의 설명과 함께 택견, 가라데, 우슈 등에 대해..(잘 안 보이는 그림을 클릭하면 확대)

 

 

 

1400년前 ‘태극 문양’ 발견

문화일보 / 기사 게재 일자 2009-06-03   최영창기자 ycchoi@munhwa.com

 

나주 복암리 제철 유적서… 국내서 가장 오래된 자료

 

전남 나주 복암리 유적 출토 태극문 목제품 한쌍(1·2)의 사진 및 적외선 사진, 목제품 1의 도면(왼쪽부터).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태극문양이 그려진 1400년 전 목제품 한쌍이 발견됐다.

지난해 전남 나주 복암리 고분군(사적 제404호) 주변 제철유적의 수혈(竪穴·구덩이) 유구(遺構·옛 건축물의 흔적)에서 출토된 태극문 목제품 한쌍은 백제 사비시기(538~660년)인 7세기 초반에 사용된 종교나 의례와 관련된 기물(器物)을 장식했던 소도구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태극문양은 경주 감은사지 장대석에 부조된 태극문(682년)이었다.

문화재청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소장 김성범)는 3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로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 대회의실에서 설명회를 열고 지난해 나주 복암리 고분군 주변 제철유적의 대형원형수혈유구(직경 5.6m, 깊이 4.8m)에서 출토된 뒤 지난 5월 보존처리를 완료한 목간(木簡) 31점과 태극문양이 그려진 목제품 한쌍을 공개했다. 이중 칼 모양의 독특한 형태를 띤 목제품(나무판) 한쌍에는 태극문과 함께 아래에 동심원문과 방사형태의 문양(방사동심원문)이 뚜렷하게 묵서(墨書·붓글씨)돼 있다.

최영창기자 ycchoi@munhwa.com

 

 

김성호 - 1934년 강원도 철원 출생. 서울대 농대 농업경제학과를 졸업. 일본 교토대학에서 농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소농론.농업지대론.농지제도를 전공하였다. 1962년부터 농촌진흥청 농림부의 농림관료였다가 1982년부터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서 근무하였고 현재는 동 연구원의 고문으로 재직 중이다. 1983년에 건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를 졸업하고 역사분야 논문과 저술활동을 하였다.


주요논문과 저서로는
1982년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 기원>
1983년 <고대 조선의 역사 연구>
1989년 <농지개혁사 연구>
1991년 <임나.삼한.삼국론 연구>
1992년 <일본서기 기년 연구>
1996년 <중국진출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
2000년 <씨성으로 본 한일민족의 기원> 등이 있다.

 

   
                      (출판사 : 맑은 소리 / 출판년도 : 1996년)
 
중국인들은 연안항해선이 주종일 뿐, 황해를 종단하는 배 건조기술은 미약했고 황해를 종단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가해조천록을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 출처 : 중국진출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 (도)맑은소리 /1996년
- 저자 : 김성호 ('34년생, 철원생, 서울대)


*** 노를 발명한 백제인 / 중국전래의 군선(도형강선) ***











*** 노를 발명한 백제인 / 중국전래의 군선(노형해선) ***















*** 노를 발명한 백제인 / 중국전래의 군선(선박규모) ***





 
 

# 중국내 담수계 지명분포









(완)
 
 
 
 

부여 관북리서 40m 백제 상수도관 발굴

연합뉴스 / 기사입력 2006-12-06 16:51 |최종수정 2006-12-06 16:51

 

백제시대 기와 상수도관

익산 왕궁리 유적에선 백제 정원 출현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부여 관북리 유적에서 길이 40m에 이르는 백제시대 기와 상수도관이 발굴됐다. 같은 백제시대 유적인 익산 왕궁리에서는 백제시대 정원이 출현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김용민)는 지난 4월 이후 진행한 관북리 일대 발굴조사 결과 대형 전각 건물터 북쪽 지역에서 기와를 조립한 관(와관<瓦管>)을 연결한 백제시대 지하 상수도 또는 도수(導水) 시설 2조를 확인했다고 6일 말했다.

이 기와 수도관은 늪에서 흘러내린 물을 방형으로 판 인공 연못에 일단 가두었다가 빼내는 수로 역할을 한 것으로 조사결과 드러났다. 따라서 이 연못은 일종의 정화시설로 기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용민 소장은 "수키와를 연결한 소형 배수시설은 익산 왕궁리 유적 같은 곳에서 더러 확인됐으나, 이처럼 규모가 장대한 대형 배수로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왕궁리 유적에서는 지난 3월 이후 조사를 벌인 결과 판돌로 장방형 공간을 구획하고 내부를 기괴한 정원석과 강자갈로 화려하게 장식한 백제시대 정원이 드러났다.

나아가 남벽 정문 부근에서는 지난해 일부가 드러난 대형 건물터가 정면 7칸, 측면 4칸에 이르는 것으로 밝혀졌다.

부여문화재연구소는 이들 유적 현장을 8-15일 일반에 공개한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끝) 

<저작권자(c)연합뉴스

 

 

 

한성백제 시절의 풍납토성의 단면

 

좀 더 확대

 

뻘층에 토성을 지을때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나뭇가지층을 두었다.
이렇게 하면 나무말뚝을 통해 나뭇가지층까지 수분이 이동하여 배출된다.

 

현대 공사에서도 뻘층에 모래기둥을 박는다. 이는 흙 속의 물을 빼내기 위해서 이다.

 

<<백제의 암호, 사비성 목간 31자의 비밀 클릭참조>>

 

동서남북이 아닌 '상하전후'로 문헌에 기록했었다.

 

각 부는 또한 동일한 방식으로 항으로 구분했다.

 

계획도시로 도로망이 발달

 

백제 사비 시대의 대표적 탑인 정림사지 3층 석탑. 정북에서 서쪽으로 2.5도 정도 벗어남. 동서남북의 방향을 잘 알고 있었다.

 

계획적인 도시였을 사비성 내의 건물들

 

조금 멀리서 본 모습

 

전체적인 사비성의 모습. 백마강을 자연해자로 하여 옆에 끼고 동쪽을 성으로 둘러쳤다.

 

 


백제 미륵사

 

<<모양새 드러낸 백제시대 궁성의 정원 클릭참조>>

 

왕궁성 정원시설 전경

 

왕궁성 정원시설 중심부 전경

 

정원 석조시설 전경

 

왕궁성 정원시설 중심부 세부 전경

 

‘ㄱ’자형 배수로 세부 전경

 

왕궁성 정원시설 출토 조경석

 

<<백제시대 '과학적 구조' 공동 화장실 발굴 클릭참조>>

 

 

 

 


 

 

 
일본 일향지역 고분에서 발굴된 고대 백제 선박 토기는 전형적인 한국 선(배)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이 왜열도 지역은 오래 전, 해상제국 백제 22담로 중 한 곳이었다. 
 
 
 

 

22담로 해상제국 백제(남부여)는 자신들의 기술로 만든 배를 타고

 그 당시에 쌓은 인적 및 국가적 네트워크를 통해 대양을 누빈 것이다

 

                   <<멀고도 가까운 사이, 왜열도쥬신 클릭참조>>   <<홍윤기의 역사기행 클릭참조>>

 

 

 

[제21회] 백제! 강국이되다
              중흥군주 무령왕



▣방송 : 2007. 11. 17 (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이상호 아나운서
▣연출 : 김현기 PD
글,구성 : 정종숙 작가
 

서기 475년, 한성 백제의 멸망.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의 연이은 의문의 죽음...

불혹의 나이에

백제의 왕위에 오른

무령왕
 
무너진 백제를 다시 일으킨 무령왕의 백제 재건 프로젝트!
가슴 속에 품은 갱위강국의 꿈은 실현될 것인가!

찬란한 백제 문명을 일군 무령왕의 일대기,
그가 펼친 백제 재건의 역사,
지금 한국사 傳에서 펼쳐진다.


 백제 무령왕의 출생 비밀

■ 백제 무령왕은 일본에서 태어났다?

무령왕의 탄생설화가 전해오는 곳은 뜻밖에도 일본의 한 작은 섬. 일본 규슈 북쪽에 위치한 가라츠시 가카라시마 섬이다. 100여 호가 살고 있는 섬마을 곳곳에서는 무령왕에 관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무령왕이 태어나 처음으로 목욕했다는 우물과, 무령왕의 탄생을 기념하는 비석까지 건립되어 있는데… 놀랍게도 <일본서기>에는 무령왕의 탄생설화가 실려 있다! 무령왕의 생전이름은 물론 출생년도까지, 공주 무령왕릉에서 확인된 내용과 매우 유사하다. 대체 무슨 이유로 무령왕은 백제가 아닌 일본의 작은 섬에서 태어난 것일까? 한국사 傳 제작진이 신비에 싸인 무령왕의 출생비밀을 찾아 일본 현지를 취재했다.


 

 무령왕의 즉위를 둘러싼 미스터리

■ 무령왕은 동성왕 피살사건의 연루자?

서기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기습 공격으로 백제 개로왕이 전 사하고 한성 백제는 멸망한다. 웅진으로 천도한 백제에서 문주 왕, 삼근왕, 동성왕이 차례로 왕위에 오르지만 모두 의문의 죽 음을 맞는데… 이때 마흔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무령왕! 피 로 얼룩진 선왕들의 죽음을 뒤로하고 혼란에 빠진 정국을 수습 한다. 그러나 무령왕의 앞날은 순탄치 않았다. 무령왕이 왕위에 오른 직후 일어난 반란사건! 그런데 주모자는 바로 동성왕을 죽인 시해범‘백가’였다. 그는 동성왕을 시해한 후, 또 다시 무령왕에 대해 반란을 시도한 것이다.

더 이상한 일은 백가가 진압군을 이끌고 온 무령왕에 대해 항복했다는 점. 게다가 무령왕은 순순히 항복한 백가를 처형하고 시신을 강물에 던져버린다. 의문투성인 백가의 행적, 그리고 무령왕의 즉위를 둘러싼 미스터리! 그간에 숨겨진 역사의 진실을 한국사 傳이 추적한다.


 

 무령왕의 백제 재건 프로젝트

■ 백제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다! - 고구려 격파와 일본 외교
국가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무령왕의 백제 재건 프로젝트! 그 시작은 잃어버린 백제의 옛 땅을 되찾는 일이었다. 무령왕 재위 12년인 512년, 고구려군의 침입으로 백제 가불성이 함락되자 무령왕은 신하들의 만류를 물리치고 직접 전장에 나선다. 1만의 고구려 대군 vs. 3천명의 백제군. 무령왕은 고구려가 방심한 틈을 타 기습공격으로 대승을 거둔다. 이는 백제의 대내외적 위상에 분기점이 되는 일대 사건이었다.


 

<1951년, 일본 국보로 지정된 청동거울의 바깥 둘레에 새겨진 글자 중에 ‘사마’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보인다. ‘사마’는 무령왕의 생전이름으로 공주 무령왕릉의 지석에 적힌 글자와 일치한다.>

 

무령왕이 이룬 백제의 국제적 위상은 일본에서도 확인된다. 2001년 12월, 일본 천황가에 무령왕 후손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인정한 아키히토 천황. 그 놀라운 고백은 일본의 역사서인 <속일본기>에 근거한 것이다. <속일본기>에는 칸무천황의 어머니인 고야신립이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태자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무령왕은 순타태자 뿐 아니라 오경박사를 두 차례나 일본에 파견해 선진문화를 전수한다. 단순한 외교관계가 아니라 일본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다.

 

■ 무령왕, 갱위강국을 선포하다

 

521년, 무령왕은 재위 20년을 맞아 백제 재건 프로젝트의 큰 획을 긋는다. 바로 갱위강국 선언! 양나라에 보내는 국서에 백제가 고구려를 크게 격파하고 다시 강국이 되었음을 알린 것이다. 6세기에 제작된 중국의 <양직공도> 에는 백제 사신의 모습과 함께 무령왕이 보낸 국서의 핵심내용이 적혀 있으며, 그 자세한 내용이<양서 동이열전 백제편>에 실려 있다.

 
국제적으로 백제의 이름을 높인 무령왕. 무령왕의 묘지석엔 ‘훙(薨)’자를 쓰는 보통 왕들과 달리 황제의 죽음을 뜻하는 ‘붕(崩)’자가 새겨져 있다. 무령왕은 기울어가는 국운을 다시 일으켜 세운 갱위강국의 위대한 황제로 기억된 것이다.

 

 

 

해양 강국 백제를 찾아서

동남 아시아·인도까지 활동 범위 넓혀 나가

소년한국일보 / 입력시간 : 2007-07-30 13:27

 

백제 땅 중심으로 바닷길 이어져 일찍부터 해외 교류… 왜국 등과 무역 통해 큰 이익
'백제 금동 대향로' 코끼리·악어 등장…겸익, 인도서 불교 공부… 경전 들여와


백제 금동 대향로에 새겨진 코끼리를 탄 사람.

 

■ 뛰어난 선박 제작 기술과 항해술 지녀

 

한반도 서남부의 긴 해안선을 따라 뻗어 있던 백제에는 좋은 항구들이 많았습니다. 바닷길이 백제 땅을 중심으로 이어져 있어 백제인들은 일찍부터 대륙과 일본 열도로 진출하기가 쉬웠지요. 백제인들의 활동 범위는 동남아시아와 인도까지 점점 넓어지고 있었답니다.

543년 백제 성왕은 왜국에 사신을 보내 부남국의 보물을 선물한 적이 있습니다. 부남국은 지금의 캄보디아로, 이는 당시 백제가 부남국과 교역을 했음을 알 수 있는 실마리지요. 성왕은 또 554년에는 신라와 전쟁을 하기 위해 왜국에 원군을 요청하면서 ‘답등’이란 것을 선물합니다.

이는 양털이 주성분인 페르시아 직물로, 북인도 지방에서 만들어진 물건입니다. 백제가 답등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북인도와 직접 교역했거나, 적어도 활발한 무역을 통해 해외의 진귀한 물건들을 구했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642년 백제 사신이 왜국과 교역을 하려는 곤륜의 사신을 바다에 던져 넣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곤륜은 지금의 동남아시아 지역 전체를 일컫는 말입니다. 당시 동남아시아의 한 나라가 왜국과 단독으로 교역하려는 것을 백제가 가로막은 사건이라고 할 수 있지요.

당시 왜국은 배 만드는 기술과 항해 기술이 부족해 백제에 의지해 외국 물건을 구입하고 있었습니다. 백제에는 방(舫)이라 불리는 큰 선박이 있었답니다. 왜국에서 ‘구다라선’이라고 불렀던 이 배는 크고 튼튼한 선박의 대명사였습니다. 선박 제작 기술과 뛰어난 항해술을 가진 백제는 동남아시아와의 무역을 통해 얻은 물건을 왜국 등지에 수출하면서 큰 이익을 얻었던 것이지요.

 

악어.

 

■ 백제인, 진취적이고 적극적…국제화된 나라

 

백제를 대표하는 예술 작품인 ‘백제 금동 대향로’에는 짐을 갖고 코끼리에 올라 탄 사람과 악어가 보입니다. 코끼리와 악어는 동남아시아 혹은 인도에 백제인이 자주 왕래를 했기 때문에 예술 작품에도 등장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백제는 지금의 일본 남쪽 오키나와에 있었던 유구국과 필리핀, 캄보디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인도 등과 활발한 교류를 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겸익 스님은 백제인의 활발한 해외 활동 상황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준 인물입니다. 그는 512년경 백제를 떠나 양자강 남쪽의 양나라에 잠시 머물다가, 배를 타고 동남아시아 지역을 거쳐 인도까지 가서 불교를 공부하고 돌아왔습니다. 인도 중부의 절 상가나사에서 인도 말인 범어를 배우고 불교를 공부했지요. 14 년 후인 526년 나란타사의 배달다 삼장 법사와 함께 귀국했습니다.

이 때 백제의 임금이었던 성왕은 겸익을 흥륜사에 머물게 하고, 인도에서 가져온 아담장과 오부율문이란 경전을 번역하라고 명하였답니다. 이 작업에는 백제의 승려 28 명이 동원되어 모두 72 권이 번역됐지요. 인도에서 건너온 책이 직접 번역됨으로써 불교의 한 교파인 율종이 크게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불교는 인도에서 발생했지만, 우리 나라 경전은 대개 중국에서 한문으로 번역된 뒤 들어온 것이었지요. 겸익은 불교의 참 의미를 알기 위해 인도까지 여행했던 것입니다.

백제인들은 겸익 스님처럼 알고자 하는 것, 새롭고 진귀한 물건을 찾아 위험한 여행도 마다하지 않았던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사람들이었답니다. 백제는 신라, 고구려, 왜, 중국 등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사는 국제화된 나라이기도 하였지요. 바다를 향해 크게 열려 있었던 나라가 바로 백제였습니다.

 

<<부활하는 고대의 한국 악기 클릭참조>>

 

 <<일본 아스카 시대 유물, 대부분 한국 불교예술이다 클릭참조>>

 

 

 

"미륵사 금제소형판은 백제 금화"

연합뉴스 / 기사입력 2009-03-16 16:21 |최종수정 2009-03-16 17:21

 

미륵사지 석탑에서 출토된 유물 사진 중 금제소형판 (서울=연합뉴스) 미륵사지 석탑에서 출토된 금제소형판. 이 금제소형판은 백제의 4품 벼슬인 덕솔이 공양에 참가했음을 나타내 주는 첫 유물이다. 2009.1.19

 

손환일 박사 주장 "화폐 구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미륵사 서탑 심초석 사리공(舍利孔)에서 사리봉안기와 함께 발견된 작은 판 모양 금제품은 백제인들이 화폐처럼 사용한 금화(金貨)의 일종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한국서예사 전공인 손환일 박사는 21일 신라사학회(회장 김창겸)가 국민대 경상관 B동 학술회의장에서 '익산 미륵사지 출토 유물에 대한 종합적 검토'를 주제로 개최하는 춘계학술대회를 통해 이런 파격적인 견해를 담은 연구성과를 발표한다.

한국 고대사회에서 금화가 통용되었다는 주장은 이번이 처음이다.

16일 주최측이 미리 배포한 '익산 미륵사지 서원석탑(西院石塔) 금제 사리봉안기와 금정명문(金丁銘文)의 서체(書體)'라는 논문에서 손 박사는 금을 두드려 펴서 만든 '금제소형판(金製小形板) 18점'으로 발표된 금 덩어리 유물들은 "크기와 형식이 일정하게 분류되므로 백제시대 금화로 사용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주장했다.

같은 학술대회 발표자인 대전대 이한상 교수도 "금제소형판은 아무래도 그 기능을 화폐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면서 "그 기원을 한반도에서 추적하면 기원 전후 무렵 신라와 가야가 태동한 진한과 변한 문화권의 목관묘에서 자주 출토되는 판상철부(板狀鐵斧)라는 철 덩어리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미륵사지 출토 금제 소형판 중 3점에서는 시주자가 누구인지를 적은 명문(銘文)이 발견됐다.

이 중 한 점에는 "중부(中部)의 덕솔(德率ㆍ백제 16관등 중 제4품) 사람인 지율(支栗)이 금 1량을 보시한다(中部德率支栗施金壹兩)"는 내용이 적혀 있고, 또 다른 한 점에는 앞ㆍ뒷면에다가 각각 "하부의 비치부와 그의 부모 처자(下部非致夫及父母妻子)" "함께 보시한다(同布施)"라는 구절을 적었다.

나머지 한 점에서는 정확한 판독이 어렵지만 사람 이름으로 생각되는 "恒"(항)과 같은 글자를 읽어낼 수 있다고 손 박사는 말했다.

손 박사는 "이들 금 덩어리 시주품 중 하나에 그 단위를 '금 1량'(金壹兩)으로 표시한 자체가 이것이 금화임을 명백히 밝혀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나아가 이 금제품들에 적힌 글씨는 "사리를 봉안할 때 이 금 덩어리들을 시주하는 사람이 그 자리에서 급하게 쓴 즉각(卽刻)에 해당한다"고 덧붙였다.

손 박사는 이번 미륵사지 석탑에서 수습한 금 덩어리와 같은 금화, 혹은 은화(銀貨)나 철화(鐵貨) 등이 "조선시대에도 금정(金丁)이나 은정(銀丁), 혹은 철정(鐵丁)이라는 이름으로 화폐로 사용된 흔적이 있다"고 부연했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

백제의 은제관식 (서울=연합뉴스) 백제 특유의 머리꽂이 장식인 은제 관식(銀製冠飾) 및 금제소평판 유물.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유물로 백제의 세밀한 기술을 엿볼 수 있다고 19일 말했다. 2009.1.19 << 문화재청 제공 >>

 

 

잊혀진 땅 백제 22담로의 비밀 (1/2)

 

잊혀진 땅 백제 22담로의 비밀 (2/2)

 

 

 

백제왕 후손 1천400년 만에 익산 찾아 (종합)

연합뉴스 / 기사입력 2009-04-17 14:57 |최종수정 2009-04-17 15:00

 

1천400년만에 귀향한 백제 왕족 후손 (익산=연합뉴스) 임 청 기자 = 1천400년 전 일본으로 건너갔던 백제 성왕의 셋째 왕자인 임성태자의 45대 후손인 오오우치 기미오(69)씨와 오오우치 다카꼬(65) 부부가 17일 익산의 무왕릉(백제 무왕의 묘소로 추정되는 곳)에 참배하고 있다.2009. 4. 17<<전국부 기사 참조>> lc21@yna.co.kr

(익산=연합뉴스) 임 청 기자 = 1천400년 전 일본으로 건너갔던 백제 성왕의 셋째 왕자인 임성태자의 후손이 백제의 고도인 익산땅을 밟았다.

백제 왕족 임성태자 45대 후손인 오우치 기미오(大內公夫.69), 오우치 다카코(大內孝子.65) 부부가 2박3일 일정으로 익산 무왕 릉과 미륵사지, 부여 백제왕릉원 등을 참배하기 위해 17일 입국했다. 오우치씨의 한국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다

오우치씨 부부는 이날 오전 익산시 석왕동 쌍릉(백제 무왕이 묻힌 곳으로 추정되는 묘)을 찾아 참배했다.

오우치씨는 이 자리에서 "시대를 넘고 대를 이어 기다리고 기다렸던 조상땅에 돌아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흥분된다"면서도 "일본국가의 형성에 커다란 공헌을 한 임성태자의 업적을 기리며 백제의 후손임을 잊지 않고 대대손손 살아왔다"라고 감회를 피력했다.

참배를 끝낸 부부는 현장에서 "문화재 보수유지에 보태달라"며 이한수 시장에게 100만 엔을 건넸다.

오우치씨는 이어 지난 1월 백제 무왕시대의 사리장엄이 대거 출토된 미륵사지로 자리를 옮겨 1시간30분간 경내를 둘러보기도 했다.

그는 미륵사유물전시관에 보관된 '금제사리호 대형사진'을 보고 "우리 선조의 기술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오우치씨 부부는 18일에는 보석박물관과 웅포 곰개나루, 충남 부여의 백제왕릉 등을 돌아보고 19일 오후 일본으로 돌아간다.

한편, 백제 성왕의 셋째 아들인 임성태자는 성왕이 신라의 복병에 의해 피살되자 슬픔을 이기지 못해 대만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 백제의 우수한 문화예술을 일본에 전래한 대표적인 왕족으로 알려졌다.(사진있음)

lc21@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

 

 

 

#이제 한걸음을 떼기 시작한 한국역사

 

일부 고고학적 발굴로 '신화' 통설 반박… 청동기 문화 한반도 전래시기도 앞당겨

강원도 속초 조양동 유적
강원도 정선 청동기 유적
그동안 신화 형태로 기술돼 온 고조선 건국 과정이 공식 역사로 편입됐다. 또 한반도 청동기 도입 시기도 최대 1000년을 거슬러 올라가게 됐다. 교육인적자원부는 2007학년도 역사 교과서를 이처럼 수정해 일선 학교에 보급하기로 했다.
따라서 고조선 건국과 관련, 기존의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라고 기술한 대목은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로 수정됐다. ‘~한다’라는 말이 있고 없음의 차이는 엄청나다.
국사편찬위원회 장득진 실장은 "그동안 사서에는 나오지만 고고학적 증거가 불충분했던 고조선 건국 시기가 최근 연구 성과로 (근거가) 뚜렷해짐에 따라 서술 방식을 변경했다"고 설명했다.
또 기존 교과서는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0세기경에, 만주 지역에서는 기원전 15세기∼기원전 13세기에 청동기 시대가 전개되었다’고 기술하고 있지만 새 교과서는 ‘신석기시대 말인 기원전 2000년경에 중국의 랴오닝(遼寧), 러시아의 아무르 강과 연해주 지역에서 들어온 덧띠새김무늬 토기 문화가 앞선 빗살무늬 토기 문화와 약 500년간 공존하다가 점차 청동기 시대로 넘어간다.
이때가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으로 한반도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고 기술해 청동기 시대를 500∼1000년 앞당겼다.
이 부분을 집필한 최몽룡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강원도 정선과 춘천.홍천, 경기도 가평, 인천시 계양구 등지에서 최근 출토된 유물 등을 근거로 청동기 문화가 한반도에 전래한 시기를 앞당겼다"고 말했다.
올해 국사 교과서를 수정하게 한 가장 큰 동인은 고고학적 유물의 발굴과 과학적 연대 측정의 결과다. 그동안 한반도 청동기시대는 기원전 10세기쯤이라는 한국 고고학계 통설은 이 시대 유적과 유물에 대한 연대 측정으로 흔들리게 됐다.
최몽룡 교수에 따르면 강원도 춘천시 신매리에서 출토된 청동기는 기원전 1510년쯤으로 추정됐다. (최몽룡 외 <동북아 청동기시대 문화연구>, 주류성 발간, 2004)
진주 남강 수몰지구에서 확인된 각종 청동기 시대 유적과 유물은 연대가 BC 10세기를 훌쩍 뛰어넘어 BC 15세기 무렵으로 조사됐다.
남강 수몰지구 중 선문대 이형구 교수(역사학과) 조사팀이 발굴한 옥방 유적의 경우 집자리터에서 나온 목탄 2점에 대한 국립문화재연구소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각각 BC 1590-1310년과 BC 1620-BC 1400년이라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당시 이 교수는 “남강지역의 유적 연대는 대략 기원전 5세기∼기원전 4세기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었으나 기원전 14∼기원전 13세기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고 지적했다.
건국대 박물관이 다른 남강 수몰지구에서 발굴한 청동기 시대 주거지 출토 목탄 2점을 측정한 결과에서도 BC 1420-BC 1100년, BC 1400-BC 1100년으로 나타났고 경남대 박물관 역시 서울대와 캐나다 토론토대에 시료측정을 의뢰한 결과 기원전 10세기를 뛰어넘은 것으로 드러났다.
강원 지역의 경우 청동기 시대가 남강 유역보다 더욱 올라가고 있다.
강릉 교동 주거지 1호의 경우 그 연대가 무려 BC 1878- BC 1521년으로 나왔고 다른 두 곳의 주거지도 중심 연대가 BC 15세기 무렵인 것으로 나타났다. 남한에서는 유일하게 청동 도끼가 출토된 속초 조양동 청동기 시대 유적 또한 국립문화재연구소 연대 측정 결과 BC 1206-BC 830으로 나왔다.
 
진주 옥방5지구 각목돌대문토기 / 진주 옥방5지구 장방형집자리 / 전남 순천 죽내리 유적 / 전남 순천 죽내리 유적(왼쪽부터)
 
뿐만 아니라 조선대 박물관이 발굴한 전남 순천 죽내리 청동기 시대 주거지도 외국 연구소에 탄소 연대 측정을 의뢰한 결과 BC 16세기- BC 15세기라는 결과가 나왔다.
춘천시 신매리 유적, 강릉 교동 주거지, 전남 순천 죽내리 유적지에서는 청동기 전기의 유물인 공열토기와 이중구연토기, 단사선문토기 등이 공통적으로 출토되기도 했다.
이에 앞서 양평 양수리의 두물머리고인돌의 덮개돌 밑 15cm 되는 무덤방 안에서 발견된 숯의 연대측정은 3,900±200B.P(MASCA 계산법으로는 4,140~4,240B.P)라는 절대연대를 보였다.
고고학자인 조유전 한국토지박물관장은 "남강 선사 유적만 해도 탄소 연대 측정치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 연대를 BC 400- BC 500년쯤이라고 추정했다"면서 " 청동기 시대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말했다. 과학적인 탄소연대 측정치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교과서 수정에 따른 고조선에 대한 기술에 대해 이견도 적지 않다. 한국교원대 송호정 교수(역사교육과)는 “기원전 15세기에 한반도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는 이야기는 학계에서 합의된 내용이 아니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청동기 유물은 극소수 장신구에 불과하다”며 종래의 통설을 고수했다.
이에 대해 이형구 교수는 “기존의 교과서에 있는 청동기 시대 역사는 중국, 일본 사람들이 쓴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에 불과하다"며 "고조선 영역이었던 한반도 서북지역의 청동기 시대 개막은 여러 가지 과학적인 증거로 보아 기원전 15세기일 것"이라고 말했다.
윤내현 단국대 동양학연구소장은 “청동기 유물이 극소수 장신구이기 때문에 시대를 수정할 근거가 못 된다는 주장은 중국과 한반도에서 발굴되는 청동기의 내용이 다르다는 사실과 만주와 한반도에 이르는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무시하는 견해”라고 반박했다.
이강승 충남대 교수(문화재위원)가 ‘청동기 있는 청동기 시대’와 ‘청동기 없는 청동기 시대’를 구분해 한반도의 청동기 시대를 BC 10세기 아래로 본 데 대해 윤내현 소장은 “청동기 시대를 말해주는 유적(유물)은 청동기 말고도 얼마든지 있으며 과학적 탄소동위원소 측정 결과나 중국의 청동기 시대와도 비교한 데이터 등을 종합할 때 한반도 청동기 시대는 BC 15세기를 넘어선다”고 주장했다.
윤 소장은 특히 “중국 랴오녕성 북부와 내몽고 자치주 경계에 있는 훙산(紅山) 지역의 하가점(夏家店)’에서는 기원전 2400여 년의 것으로 보이는 청동기가 많이 출토되었다”면서 “한반도의 고인돌, 청동기 유물을 만주지역의 그것들과 비교 분석할 때 한반도 청동기 시대를 BC 2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증거들이 상당하다”고 말했다.
고조선은 수정된 교과서에 역사로 기술됐지만 현실에서는 여전히‘신화’라는 통설에 갇혀 있다. 또한 고조선의 실체를 둘러싼 강단 사학계와 재야 사학계의 이견도 여전하다. 고조선이 명실상부한 ‘역사’로 자리잡기에는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중국 내몽골자치구 적봉시 동북쪽에 紅山(홍산)이라는 산이 있다. 몽골사람들이 ‘우란하따(烏蘭哈達)’라고 부르는 이 붉은 바위산 인근에서 학계를 놀라게 한 거대한 제단(壇)과 신전(廟)`적석총(塚) 등 거대한 후기 신석기 문화가 발견됐다. 100여년 전의 일이다. 중국 요녕성과 내몽골, 하북성 경계의 燕山(연산) 남북, 만리장성 일대에 널리 분포된, 국가 체제를 완벽하게 갖춘 이 유적을 ‘홍산문화’라고 부른다.

◇홍산문화를 세상에 처음 알린 사람은 일본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였다. 1906년 적봉 일대 지표조사를 하던 중 많은 신석기 유적과 적석묘 등을 발견했는데 동북지방과 만주, 한반도 일대에서만 발견되는 무덤 형태다. 1955년 이를 ‘홍산문화’로 이름 붙였는데 이후 1982년 요녕성 뉴허량(牛河梁)에서도 같은 유적이 대거 발굴되자 세계 각국 언론들은 ‘5천 년 전 신비의 왕국’이라며 대서특필했다. 이 일대는 현재 발굴작업이 계속되고 있으나 중국의 방해로 연구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 하고 있다.

◇황하문명보다 앞선 서기전 4천500년~2500년경으로 추정되는 홍산문화는 통상 청동기 시대에나 출현 가능한 분업화가 이뤄진 국가형태를 띠고 있다. 특히 가면과 玉(옥) 장식 등에 곰 형상이 투영된 유물이 대거 발견돼 국내 학자들은 곰 토템을 지닌 웅족과 청동기 시대의 고조선 초기(고조선 중기 이후는 철기시대) 이전 한민족 원류 중 하나인 신석기 시대의 배달국 초기(한웅배달국 후기는 청동기시대)가 자리했던 곳이라고 주장한다. 즉 홍산문화는 단군조선 건국의 토대일 가능성이 높은 유적이라는 말이다.

◇2006년에 중국이 뉴허량 유적 등 35개를 중국의 세계문화유산 예비목록에 포함시켰다고 한다. 遼河(요하) 일대의 북방 신석기 문화를 중국 문명권에 편입하려는 중국의 探源工程(탐원공정)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국내 학자들은 “고조선과 부여`고구려`발해 등을 중국사에 편입하기 위해 요하 일대의 홍산문화를 중국문명권에 편입할 의도”라고 비난하고 있다.

◇30년 전 중화문명의 시발점을 앙소문화에서 하모도문화로 바꿔 재설정한 중국은 뉴허량 유적 발견 이후 홍산문화를 ‘요하문명’이라 부르며 중화 3대 문명의 시발점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漢族(한족)의 것과 엄연히 다른 동이족 문화인데도 과거 일제가 한 것처럼 한민족의 뿌리마저 잘라버리려는 역사왜곡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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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왕조 은나라, 동이족 일파였다”

경향신문 / 입력 : 2008-11-03-17:40:46수정 : 2008-11-03 17:40:47                   중국 안양(은허) | 이기환 선임기자 lkh

 

ㆍ中 ‘은허’ 발굴 80주년 기념 현장을 가다

지난 10월29일부터 31일까지 중국 안양 은허(殷墟)유적에서 은허발굴 80년을 기념하는 학술대회가 열렸다. 중국내외의 학자 160여명이 갑골문으로 대표되는 은허발굴의 의의를 되돌아보고 발굴성과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학술대회에는 계간 ‘한국의 고고학’ 주관으로 답사단이 파견됐는데, 기자는 이 답사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이곳은 은허(殷墟) 유적보다 이른 시기의 상(商)나라 성이 존재했던 곳인데요. 1호 궁전터는 이미 1999년 발굴되었고, 이곳은 지금 막 확인된 제2호 궁전터입니다.”

지난 10월30일 오후 5시, 중국 허난성(河南省) 안양(安陽) 은허(殷墟).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할 무렵.

은허 발굴 8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 모인 국내외 참석자들의 눈이 빛났다. 이곳은 유명한 은허 유적에서 강(환수·洹水)을 사이에 두고 강북으로 약 2㎞ 정도 떨어진 원북상성(洹北商城) 터. 탕지건(唐際根) 중국사회과학고고연구소 연구원은 설명을 끝낸 뒤 참석자들을 이끌고 한참 더 갔다.

 

 

은허(殷墟) 유적의 원경. 36㎢의 넓은 지역에 은(상)나라 말기 궁전과 제사터, 왕릉 등이 조성돼 있으며 15만편의 갑골이 확인되기도 했다. 중국 100대 고고학 발굴사 가운데 1위를 차지했다.


“자, 이 판축한 흔적 좀 보세요. 이것이 이번에 새롭게 확인한 원북상성의 북성벽입니다.”

따끈따근한 발굴 성과를 보면서 유난히 감상에 젖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1928년부터 은허를 발굴한 리지(李濟)와 둥쭤빈(董作賓), 량쓰융(梁思永) 등의 후손들이었다.

109년 전인 1899년 국자감 좨주이자 금석학자였던 왕이룽(王懿榮)은 지독한 학질에 걸렸다. 그는 처방 받은 용골(龍骨)이라는 약재에 새겨진 글자를 확인했다. 이것은 갑골문자였다. 이후 학자들의 추적 끝에 약재의 원출처가 바로 허난성(河南省) 안양(安陽) 샤오둔춘(小屯村)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1928년 둥쭤빈을 대장으로 대대적인 샤오둔촌 발굴에 나섰고, 마침내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나온 은(상·BC 1600~BC 1046년) 말기(BC 1300년부터)의 도성인 은허(殷墟)를 찾아낸 것이다. 무엇보다 완전한 체계를 갖춘 문자(갑골문자)를 확인했다. 이 갑골문은 현재 세계인구의 4분의 1이 사용하는 한자의 원형이다. 은허 발굴은 2001년 중국학계가 선정한 ‘중국 20세기 100대 고고학 발굴’ 가운데 단연 1위로 뽑혔다. 2006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한자의 원형이 된 갑골문. 갑골은 완전한 체계를 갖춘 문자로 현재 세계인구의 4분의 1이 사용하고 있다.


“특히 1936년에는 12기의 왕릉과 2500여기의 제사갱, 부장묘가 발굴됐는데 학자들은 이것이 은(상) 말기인 BC 1300년에서 BC 1046년 사이에 재위했던 12명의 왕, 즉 역사서에 나온 반경에서 주왕까지 12명의 왕으로 해석했어요.”(이형구 선문대 교수)

답사단의 눈길을 잡아 끈 것은 갑골전시관이었다. 지금까지 은허에서 확인된 갑골은 15만편에 이르는데, 1936년 이 한 곳(YH 127 갑골갱)에서만 무려 1만7000여편의 갑골이 쏟아졌다.

문득 ‘상서(尙書) 다사(多士)’편에 나온 “오직 은(상)의 선인들만이 전(典)이 있고, 책(冊)이 있었다”는 귀절을 떠올랐다. 중국학계는 “이것을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당안고(당案庫·역사기록을 보관한 창고)”라고 표현했다. 지금의 국가기록원인 셈이다.


은(상)은 갑골에 하늘신과 조상신, 자연의 신령에게 왕실과 나라의 길흉을 점친 것으로 유명하다. 군대, 형벌, 전쟁, 공납, 농업, 수공업, 상업, 축목, 기상, 건축, 질병, 생육, 길흉 등 국가의 대사는 물론 소소한 일상까지 일일이 점을 친 뒤 그것을 버리지 않고 기록으로 남겨두었던 것이다. 확인된 15만 편에서 확인된 갑골문은 4500자에 이르지만 아직 해독된 글자는 1000여자에 지나지 않는다.

답사 내내 경탄에 마지 않은 것은 은(상)의 청동기와 옥기 제작 기술이었다. 은허에서 출토된 청동기는 5000점이 넘는데, 사모술(司母戌)이란 명문이 있는 청동방정(鼎·사각형 모양의 솥)은 무게가 832.75㎏에 이르렀다. 옥기는 2600여건이 확인됐는데, 중국 동북방 차하이-싱룽와에서 발원한 옥기문화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은(상)은 동이족의 일파라는 점이다. 고고학자 푸쓰녠(부사년)은 “은(상)나라는 동북쪽에서 와서 흥했으며, 망한 뒤에 동북으로 돌아갔다”고 단정했다. 이번에 발굴된 원북상성의 경우 중심축이 동북으로 13도 정도 기울어져 있다. 이는 전형적인 상나라 도성의 방향인데, “고향(발해연안)에 대한 짙은 향수를 나타낸 것(궈다순·郭大順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이라 해석되고 있다.

이형구 교수는 “고구려·백제의 선조인 부여 역시 점을 치고, 술과 노래를 좋아하며, 백색을 숭상하는 등 은(상)의 풍습을 빼닮았다”면서 “하늘로부터 왕권을 받았다는 뜻인 역법(曆法)마저 은의 역법을 썼다”고 말했다.

이제 짙게 깔린 어둠에 바람마저 휑하여 더욱 쓸쓸해진 은허 현장. 답사단은 은(상)이 망하자(BC 1046년) 왕족인 기자(箕子)가 은허를 지나면서 불렀다는 맥수지가(麥秀之歌)를 떠올렸다. 하지만 은(상)의 역사는 현재진행형이다. 철저히 파괴된 역사지만 그 동이의 역사는 3000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현현하고 있으니까….

<중국 안양(은허)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갑골문자보다 1000년 앞선 골각문자 발견

중앙일보ㅣ2008.10.22 02:17 입력 / 2008.10.22 16:51 수정

 

4000 ~ 4500년 전 추정 … 동이족 문자 가능성

 

중국 최초의 문자로 알려진 갑골(甲骨)문자보다 1000년이나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새로운 문자가 발견됐다.

갑골문자는 중국 고대 상(商·BC 1600~1046년)나라의 수도인 은허(殷墟·허난성 안양현)에서 1899년 처음 발견된 이후 중국 최초의 문자로 인정받아 왔다.

산둥(山東)대 고고미술학연구소 류펑쥔(劉鳳君) 소장이 최근 중국 고고학 관계자들을 초청한 세미나에서 갑골문자 이전에 다른 형태의 골각(骨刻)문자가 산둥성 창러(昌樂)현 지역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밝혔다고 홍콩 문회보(文匯報)가 21일 보도했다. 류 소장은 중국 고고미술학의 창시자로 학계의 명망이 깊은 학자다. 이 자리에 참석한 사회과학원 왕위신(王宇信) 교수 등 은상문화협회(殷商文化協會) 관계자 5명은 모두 류 소장의 학설에 동의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세미나에서 이 문자는 ‘창러골각문’으로 이름 붙여졌다.

산둥성에서 발견된 신석기 시대 유물로 추정되는 골각문자(左), 중국 최초의 문자로 알려진 갑골문자(右).


류 소장은 산둥성 민간 소장가인 샤오광더(肖廣德)가 2004년부터 최근까지 창러현 지역 주변에서 수집한 수백 개의 골각문자를 연구한 결과 이 같은 결론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류 소장에 따르면 이들 도안은 소의 어깨뼈와 사슴·코끼리 뼈에 새겨져 있었다.

도안의 형태는 다양했다. 뼈 한 곳에 100여 개의 서로 다른 도안이 새겨진 것도 있고, 1~2개의 도안만 새겨진 뼈도 있다. 여러 개의 도안은 세로로 정렬돼 있어 특정 사안을 기록한 문자로 봐야 한다는 게 류 소장의 주장이다. 단순한 그림일 경우 이처럼 정렬된 형태로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이다. 점복(占卜)기록인 갑골문자와 달리 골각문자에선 점복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류 소장은 “뼈의 색깔과 석화(石化) 상태를 판단해 볼 때 문자를 새긴 연대는 4000~4500년 전으로 보이며, 이는 중국 산둥성의 룽산(龍山) 신석기 시대에 해당된다”고 말했다. 함께 출토된 뼈로 만든 칼과 송곳은 전형적인 룽산 중·후기 시대의 도구들이었다.

중국 고고학자들은 당시 산둥 지역은 한민족을 포함한 동이(東夷)족들이 집단으로 거주했기 때문에 이 골각문자는 동이문자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류 소장은 “문자의 모양도 고대 상형문자인 동이문자 계열에 속한다”고 지적했다. 류 소장은 이어 “안양(安陽)을 중심으로 한 은허 지역에서 발견됐던 갑골문자도 동이족의 골각문자가 발전한 형태일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20세기 중국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 갑골문자 발견이었다면 이번 골각문자 발견은 중국 역사를 지금보다 1000년 이전으로 돌리는 21세기 중국 고고학의 역사적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홍콩=최형규 특파원

 

최형규 기자 [chkc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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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요서지역 해안도시인 진시시(錦西市) 소황띠(小荒地)라는 고대성곽에서 출토된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 봉니와 <승>(丞) 자 봉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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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의 종족 짱골라  

 

교수 “순수한 은 없다”… 민족 섞여 혈통 불분명

동아일보 / 기사입력  2007-02-16 03:00

 

일개 민족이 전 세계 인구의 19%인 13억 명이나 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진 학자가 있었다. 중국 란저우()대 생명과학학원의 셰샤오둥() 교수. 회족()인 그는 한족()과 서북지역 소수민족의 유전자(DNA)를 몇 년에 걸쳐 조사했다. 중국 서북지역 소수민족의 기원과 이동 경위를 파악하기 위한 연구였다.

조사 결과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다는 한족은 실제로 1개의 민족이 아니었다. 한족이라고 부를 만한 순수한 혈통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중국 언론은 13일 셰 교수의 연구 결과를 자세히 보도했다.

셰 교수는 “오래 전부터 한족은 중원()에 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는 어느 한 시기에 한족을 주변 국가 또는 민족과 구별하기 위해 지역적으로 획정한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일반적으로 ‘염제와 황제의 자손()’으로 생각돼 온 한족이지만 연구 결과 염제와 황제의 발원지는 중원이 아닌 ‘북적(·북쪽 오랑캐)’지역으로 드러났다는 점이다.

황제()의 발원지는 현재의 간쑤() 성 친양()에서 톈수이()에 이르는 지역이고 염제()의 발원지는 간쑤 성 동부에서 산시(西) 성 서부에 걸쳐 있는 황토고원으로 이들 지역은 원래 ‘북적’ 지역이었다.

중국 역사에 나타나는 중원의 범위는 산시(西) 성 남부와 장쑤() 성 서부 및 안후이() 성 서북부를 포함한 허난() 성 일대. 따라서 이 지역에 사는 사람이 바로 중원 사람이라고 생각돼 왔지만 이 역시 사실과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셰 교수는 “연구 결과 현재 소수민족이 된 객가족()이 오히려 고대 중원인의 문화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드러났다”며 “순수한 한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 주변의 소수민족이나 주변 국가가 한족과 융합한 결과”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셰 교수의 연구결과에 중국의 일부 누리꾼은 셰 교수가 한족의 ‘동포감정’을 훼손했다며 사죄할 것을 요구했다.

한족의 비율은 중국 대륙이 92%, 대만이 98%, 홍콩과 마카오가 각각 95%와 97%이다.

베이징=하종대 특파원 orionha@donga.com

 

ⓒ 동아일보 & donga.com

 

 

 

 

 

 

“漢族, 단일민족 아니다 해!”
중국 유전연구소 충격 발표 … “지배민족 편입된 ‘가짜 한족’ 수천 년간 묵인”

중국을 여행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중국의 남쪽과 북쪽 사람의 생김새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문외한이 보더라도 광둥(廣東) 지방 사람과 베이징 사람과는 겉모양이 뚜렷이 구분된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자신들을 같은 한족(漢族)이라며, 한족과 닮지 않았다는 말에 상당한 불쾌감을 표하곤 한다. 그러나 최근 중국에서는 이들을 몹시 불쾌하게 할 만한 발표가 있었다. 54개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임에도 13억 인구의 92%가 한족이라는 중국 정부의 공식 인구 통계를 부정하는 연구결과를 발표했기 때문. 거대 순수 혈통으로 인정받던 중국 한족이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는 이번 연구 결과는 중국 사회를 뒤흔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번 발표가 중국 한족에게 더욱 충격적인 것은 중국 한족의 ‘순수혈통론’에 반기를 들고 나선 주체가 바로 중국 국영 연구소라는 점이었다. 중국 과학원 소속 유전연구소 인류유전자연구센터가 지난 5월 26일 15년 동안 진행한 중국인의 성씨와 유전자 관계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한족이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고 전격 선언하고 나선 것. 분석자료를 통해 연구팀이 내린 결론은 중국 남부 지역인 푸젠성(福建省)과 장시성(江西省)에 걸쳐 있는 우이산(武夷山)과 난링산맥(南嶺山脈)을 경계로 남쪽과 북쪽에 거주하는 ‘한족’이 혈연상으로 확연하게 구분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연구팀은 두 개의 ‘한족’이 한족과 소수 민족 간 유전적 차이보다 더욱 큰 차이점을 보였다고 발표해 파장을 더했다.

 

 

난링 산맥 경계 두 개의 ‘별개 집단’

 

이 연구팀의 한 관계자는 “한족이 통치하던 송나라와 명나라 시기,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등 모두 세 차례의 인구조사 내용을 분석하고 500여 편에 이르는 고문헌과 족보를 참조했다”며 “동시에 수백만 명의 중국인 혈액을 검사해 분석한 결과 이와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유전학자들의 이런 연구 결과는 일부 소장 역사학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중국의 역사는 황허(黃河) 유역 한족세력의 남방 침략과 정복의 역사였고, 이 과정에서 남방의 토착민이 자신의 출신을 속이고 한족 행세를 하면서 이같은 결과가 빚어졌다는 게 학자들의 주장이다. 북경의 한 역사학자는 “한족만이 중국 사회에서 정치적 파워를 가질 수 있는 상황에서 토착민들이 우월한 중화문화권에 편입하기 위해 한족임을 자처했다”며 “중앙 정부도 소수민족 복속정책의 일환으로 그것을 묵인하고 장려해 왔다”고 말했다. 한편 이들 ‘가짜 한족’ 외에도 한족과 소수민족 간의 결혼으로 인해 태어난 후손 중 절대 다수가 소수민족을 포기하고 사회생활에 유리한 한족을 택한 것도 한족 양산의 주요인으로 꼽힌다. 현재 중국에서 부모의 출신 민족이 서로 다르면 자녀에게 선택 권한이 주어지지만, 소수민족을 택하는 자녀는 거의 없는 실정.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이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것이다.

 

결국 한족은 ‘가짜 한족’에 대한 묵인과 ‘민족 선택제’라는 소수민족 통치 기술로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이는 거꾸로 지배민족으로서 한족의 위치를 수천 년 동안 보전하는 힘이 되었다. 역사학자들은 소수민족을 한족의 수로 압도하려는 중국 정부의 ‘인해전술식’ 인구정책의 결과물이 바로 92%라는 통계수치라고 비웃는다.

 

어쨌든 ‘중화주의’라는 민족적 개념을 통치 이념의 전면에 내세우는 중국 당국에게 ‘한족이 사실상 두 개의 별개 집단’이라는 사실은 커다란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 인류유전자연구센터의 이번 발표는 국영 연구소의 발표임에도 중국 언론매체에 거의 소개하지 않고 있다. 한족의 이익이 중국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였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단면이다.

 

< 소준섭/ 상하이 통신원 > youngji@81890.net
발행일 : 2001 년 06 월 14 일 (288 호)
쪽수 : 62 ~ 62 쪽

 

<<배달겨레의 유산, 골각문자와 갑골문자 클릭참조>>   <<유전자로 밝혀보는 배달겨레의 뿌리 클릭참조>>

 

▲‘중화문명의 시원(始源)을 캐는 프로젝트’라는 뜻인 ‘중화문명탐원공정’은 현재 예비연구가 진행 중이며, 산시(山西)성 린펀(臨汾)시, 샹펀(襄汾)현과 허난(河南)성 신미(新密)·덩펑(登封)시 등에서 중점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곳은 ‘화하족(華夏族)’이 활동했던 중심 지역이다. 특히 화하족은 낙양을 중심으로 살아가던 소수민족이었다. 하지만 동아시아 전대륙을 차지했던 배달겨레에게 흡수되어 사라졌다.

 

 

  

 

 

 

 

 

 

 

 

 

 

 

 

 

강인욱의 북방 역사 기행, 북한과 중국이 발굴한 발해유적

국제신문 / 입력: 2009.01.01 19:32

 

北·中 공동발굴 결과 만주 고조선·발해가 韓역사로 밝혀지자 '쉬쉬'
中, 63년 이후 30년 넘게 침묵 1997년 마지못해 내용 공개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북한과 중국이 공동발굴한 길림성 돈화의 육정산 고분군.
1963년 8월 늦여름 더위가 한창이던 때에 17명의 북한 고고학자는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향했다. 6·25동란이 끝난 지 10년밖에 지나지 않아서 먹고 살기도 힘들었을 당시였겠지만, 그들은 한민족의 역사를 새롭게 쓰자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북한의 학자들은 두 팀으로 나뉘어서 중국 학자들과 공동으로 한 팀은 고조선의 역사를 밝히기 위해 요령성, 내몽고 동남부 지역의 비파형동검 관련유적을 조사했고, 또 다른 한 팀은 길림성과 흑룡강의 발해유적을 살폈다. 그들의 조사는 1965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리고 3년 간의 조사는 1966년에 북한에서 보고서로 출판되었지만 누가 발굴하고 집필했는지 적혀있지 않았다. 중국 측은 이 발굴에 대해서 30년 넘게 침묵하다가 1997년에서야 그 보고서를 냈다. 하지만 중국 보고서에는 북한과 같이 발굴했다는 내용은 한 줄도 없었다.

중국으로서는 잊고 싶은 발굴이었고, 북한 측에게도 숨겨놓고 싶은 보고서인 셈이다. 왜냐하면 당시의 발굴로 만주지역의 고조선과 발해는 한국의 역사이며, 한민족의 고대사는 현재의 국경이 아닌 만주지역을 포괄한다는 주장을 굳히게 되었다. 반대로, 중국으로서는 문화혁명의 여파로 사회가 혼란스러운 데다 자칫하면 공동발굴이 갓 점유한 만주에 대한 영유권 문제로 번질까봐 우려하게 되었다.

결국 조·중 공동발굴은 금기시되었다. 하지만 북한의 보고서가 남한과 일본에서 계속 인용되자 마지 못해 공동발굴이라는 이야기는 뺀 채 그 내용을 공개하게 된 것이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었던 인심 좋은(?) 중국의 결정에는 당시 중국의 총리였던 주은래(周恩來)의 역할이 컸다. 그는 만주지역이 고대 이래로 한국의 역사였으며, 공동으로 조사하는 것은 뜻 깊다고 적극적으로 공동발굴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그때 중국은 지금같이 역사의 왜곡에 집착하지 않았었다. 북한과 사회주의 형제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고, 만주가 현재 자신들의 영토라는 것을 고마워했지, 결코 그 역사를 뺏으려 하지 않았다.

당시 북한의 학자들은 길림 돈화의 육정산 고분, 발해의 수도였던 흑룡강 영안 동경성 유적을 발굴했다. 육정산 고분군은 발해 정효 공주묘가 발굴된 대표적인 고분유적이요, 동경성은 일제시대 일본 사람들이 발굴한 이래 발해의 대표적인 궁성지였으니 가장 중요한 유적들을 조사한 셈이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성과는 매우 알찼다. 특히 동경성에서 발굴한 얼굴이 그려진 벼루는 발해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실물자료로 평가된다.

필자가 이 보고서를 접한 것은 1994년으로, 당시 비파형동검자료를 모으던 중에 어렵사리 흐릿한 복사본을 구해서 읽으면서 감탄했던 기억이 새롭다. 2006년, 2007년에 육정산 고분과 동경성을 갔을 때 따사로운 아침햇살에 펼쳐진 유적을 보노라니 대학원 시절 놀라움에 넘겼던 책장 하나 하나가 떠오르는 듯 했다. 하지만 필자의 답사는 중국의 감시 때문에 많은 고초를 겪었다. 육정산과 성자산(대조영이 건국한 동모산으로 추정됨) 유적은 감시를 피해 새벽에 갈 수밖에 없었다. 또 발해 동경성을 답사할 때는 중국 관계자들에게 몇 시간 억류되기까지도 했다.

2006년 여름의 일로 필자가 동경성을 갔을 때에 중국은 단독으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해 유적을 발굴정비 중이어서 제한된 지역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필자의 답사팀 중 한 명은 출입금지 팻말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발굴장면을 무심코 사진을 찍다가 발각되었고, 우리 답사팀은 몇 시간 버스 안에서 갇혀 있어야 했다. 결국 사진기의 사진을 지우고 벌금을 무는 것으로 일은 마무리 되었는데, 며칠 뒤에 다른 한국 학자팀이 방문하자 먼저 왔던 사람들이 억류되었네 하면서 아예 출입을 금지시켰다는 것이다. 이 말이 어떻게 돌았는지 한 달 뒤에 러시아를 가니 공동발굴하는 러시아 친구가 "강인욱, 자네 중국에서 감옥에 들어갔다는데 어떻게 도망친거요?"라고 묻는 게 아닌가. 발 없는 말이 천리간다는 말을 실감했다. 그런데 천리 가는 발 없는 말 치고 제대로 가는 법은 없는 것 같다.

새해가 밝았다. 올해에는 1963~1965년도 같은 국가 간의 사이좋은 공동연구가 이루어지는 '태평성대'가 도래하길 바랄 뿐이다.
 
부경대 사학과 교수

 

 ⓒ 국제신문(www.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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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집요한 `역사공정`

중앙일보 / 2006.12.18 04:26 입력 / 2006.12.18 07:00 수정

 

이젠 한반도 문화 뿌리까지

 

 

중국이 한반도와 만주 문화의 뿌리로 알려진 랴오허(遼河) 일대의 북방 신석기 문화를 자국 문명권에 편입하려는 노력을 가속하고 있다. 선사(先史)시대 중국문명의 판도를 기존 학계가 주장해온 황허(黃河)와 창장(長江) 유역에서 여타 지역으로 확대하려는 이른바 '중화문명 탐원공정(探源工程)'에 따른 것이다.

17일 중국 언론에 따르면 국가문물국은 랴오닝(遼寧)성 뉴허량(牛河梁) 신석기 유적 등 35개를 세계유산위원회에 등재 신청할 중국의 세계문화유산 예비 목록에 포함했다.

국가문물국은 적어도 10년에 한 번씩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 예비 목록을 수정해 제출하도록 한 '세계문화.자연유산 보호협약'에 따라 1996년에 이어 이번에 목록을 수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뉴허량 유적을 랴오허 유역에 분포한 북방 신석기 문화의 대표적 유적의 하나로 분류해 왔다. 랴오허 일대 문화는 한반도와 만주 문화의 원류를 형성한 것으로 평가돼 왔다.

이번 조치에 대해 전문가들은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 등을 중국사에 편입하기 위해 이들 문화의 원류인 랴오허 일대의 북방 문화를 중국 문명권에 편입할 의도"로 파악하고 있다.

중국 사학계는 황허와 창장 유역을 중국문명권으로 분류하고 랴오허 일대는 중국문명과 뿌리가 다른 북방문명으로 파악해 왔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올해 선양(瀋陽) 박물관에서 '랴오허 문명전'을 여는 등 일련의 역사 왜곡을 진행하면서 북방문명을 중화문명권에 편입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한편 새로 작성한 예비 목록에는 뉴허량 유적 외에도 ▶대운하(大運河)▶실크로드▶장경동(藏經洞) 등이 포함됐다. 그러나 헤이룽장(黑龍江)성 닝안(寧安)시 보하이(渤海)진에 있는 옛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유적은 복원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목록에서 빠져 당분간 신청이 어려울 전망이다. 예비 목록에 오른 유산 중에서 2008년 32차 세계유산위원회 총회에 등재 신청할 유산이 최종 선정된다.

장세정 기자

◆ 뉴허량 유적=랴오닝성 링위안(凌源)시 젠핑(建平)현 근교에서 1981년에 발굴된 신석기 유적. 북방 신석기 문명(기원전 7000년)의 하나인 훙산(紅山)문화에 속하는 유적으로 황허 유역의 중원 신석기 문명보다 일찍 발생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랴오허강 일대에 기원전 3500년 무렵에 형성됐다. 섬세한 옥기(玉器)와 돌무지무덤(적석총) 등이 발견됐다. 특히 흙으로 빚은 여신의 두상(頭像)은 전형적인 몽골 계통의 피부색을 하고 있어 중원문명과 확연히 구별된다.

◆ 탐원공정=상고사를 고쳐 써서 선사시대 중국문명의 판도를 확대할 목적으로 중국 당국이 벌이고 있는 사업이다. 랴오허 일대에서 황허문명(기원전 3000년)보다 더 일찍 발생한 신석기 유적이 발굴되자 중국 당국이 이를 자국 역사에 편입하기 위해 2003년부터 해온 사업이다. 랴오허 일대를 편입하면 중국문명이 기원전 1만 년까지 올라간다. 현재의 정치 사정에 맞춰 역사 왜곡을 시도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장세정 기자 [zhang@joongang.co.kr]

 

 

 

 

# 고대 시베리아 신석기 유물 (출처 : 민족반역자처단협회)

 

- 세석기 -

 


- 세석기 문화권 -

 


- 철제의료기구(좌)와 흑요석으로 만든 세석기(간석기)날을 현미경으로 비교한 것 -

철제의료기구는 울퉁불퉁한데 비해 세석기는 매끄럽다, 즉 날카로움은 세석기가 더 뛰어나다.

 

- 세형돌날로 직접 고기를 잘라보는 사진 -

 

- 샤먼이 사용하던 사슴뿔 관 -

 

- 암각화 분포도 -

 

- 사슴뿔로 만든 곡괭이 -

 

- 뼈바늘, 현재까지도 일부 이누잇족이 쓰고 있다 -

 

- 돌칼로 이발하는 이누잇족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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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종교국가연합, 21∼24일 서울서 ''몽골반점동족''국제대회

세계일보 / 기사입력 2004-09-19 15:27 |최종수정2004-09-19 15:27

 

 

세계 '몽골리안' 한데 뭉쳐 평화운동

 

세계 처음으로 몽골반점을 가진 종족들의 지도자 회의가 열린다. 또 몽골반점 종족 국제기구가 창설된다.

세계평화초종교초국가연합(IIFWP·회장 곽정환)은 초종교초국가평화의회(IIPC)와 공동으로 21일부터 24일까지 서울 잠실 롯데호텔에서 11개국 13개 ‘몽골반점 종족(몽골리안)’이 참가하는 ‘세계몽골반점 동족지도자 국제평화회의’를 개최한다.

이번 행사는 평화의 시원적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 몽골리안에 대한 역사적 재인식과 문화적 각성을 통해 동북아시아와 나아가 세계 평화를 도모하는 한편, 세계적인 ‘몽골리안 협력 벨트’를 조성한다는 측면에서 의의를 지니고 있다.

몽골반점이란 갓난아이의 엉덩이 위쪽에 생긴 푸른 반점으로 한국·몽골 등 동북아에 거주하는 북방계 종족에서 주로 나타나지만, 전 세계에 분포돼 있다. 몽골리안의 형질적 특성이 형성된 곳은 시베리아 바아칼호 부근이라고 한다.

시베리아 몽골리안은 다시 옛 시베리아족(옛 아시아족)과 새 시베리아족(새 몽골족) 두 그룹으로 분화된다. 옛 시베리아족에는 축치족 코리야크족 캄차달족 길리야크족 아이누족 아메리카인디언 등이 있고, 새 시베리아족에는 사모예드족 위구르족 핀족 터키족 몽골족 퉁구스족 등이 있다.

이번 회의에는 한국을 비롯해 일본, 중국 만주·네이멍구·위구르(신장성), 몽골,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터키, 헝가리, 핀란드, 북미인디언, 남미인디언, 에스키모 등 13개국에서 총 500여명의 정치 종교 학계 비정부기구(NGO) 등 지도자들이 참가해 세계 평화를 위한 몽골리안의 역할과 협력 방안 등을 모색할 계획이다.

‘심정문화 세계와 영구적인 평화의 실현―몽골반점 종족의 역사, 문화, 가정 전통의 의의’라는 주제로 열리는 이번 회의에는 ▲몽골리안의 근원과 가정문화의 재발견(김충렬 고려대 교수·철학) ▲동북아시아 국가의 문화적 교류(박흥순 선문대 교수·국제학) ▲몽골리안의 평화와 심정문화(신현덕 한국산업기술대 교수·교양학) 등 8개의 전체 및 그룹 회의가 진행될 예정이다.

 

◇몽골리안의 시원지로 알려진 바이칼호 내 알흔섬이 러시아 후지르 마을 언덕 너머로 신비스럽게 바라다 보인다.

특히 23일에는 ‘21세기 국제평화 하이웨이 프로젝트’ 설명회와 ‘지구촌 평화와 복지를 위한 고찰―몽골리안 연대·협력의 길’을 주제로 한 종합 심포지엄이 마련되며, ‘몽골반점동족 세계평화연합’이 창설돼 국제평화기구로 출범할 계획이다.

회의 의장인 곽정환 IIFWP회장은 “인류를 한가족으로 묶기 위해 참사랑·참생명·참가정 운동을 펼쳐온 문선명 총재의 주창으로 ‘세계몽골반점 동족지도자 평화회의’를 열게 됐다”고 회의 개최 배경을 설명했다.

곽 회장은 이어 “몽골리안은 시원의 시대부터 인류 평화와 복지를 갈망했던 종족이었으나 오늘날 정체성과 존재의 근본이 크게 위협을 받고 있다”며 “몽골리안 문화와 정신적 원형을 회복하는 일은 지구촌 화해·협력 시대에 매우 커다란 의미가 있다”고 덧붙였다.

IIFWP는 전·현직 국가수반, 종교 지도자 등 국가 지도급 인사들이 연대해 인종·국가 간 갈등, 종교분쟁 등 지구촌 난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고 있으며, 지난해 12월과 올해 5월에는 분쟁지역인 이스라엘에서 ‘평화대행진’을 벌여 세계의 이목을 끈 바 있다.

정성수기자/hulk@segye.com

■ 몽골리안이란

우리나라 대다수 갓난아이들은 엉덩이에 청색 반점이 있는데, 이는 삼신할머니가 아기를 받다가 아기가 숨을 쉬지 않자 엉덩이를 때려서 생긴 멍 자국이라는 재미난 일화가 전해진다. 그러나 이 청색 반점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몽골계 사람들에게서 특징적으로 나타나 ‘몽골반점’이라는 명칭이 붙었으며, 몽골리안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징표이기도 하다.

몽골반점은 의학적으로 진피의 심층에 있는 방추형 또는 분지형의 멜라닌 색소세포가 모여 표피를 통해 보이는 것으로, 생후 2세까지는 빛깔이 진하다가 점차 옅어져 11∼12세가 되면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한국 어린이에게서는 90 % 이상이 나타난다.

상고시대로부터 평화와 복지를 찾아 세계를 순례한 몽골리안 종족의 선조들은 인류 문화사에 귀한 자원으로 알려진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인류를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하는 위대한 문명을 탄생시켰으며, 인류사의 대변혁을 가져왔다. 그 시원지는 러시아 동시베리아 남부 지역에 위치한 바이칼호 수내 알흔섬으로 전해진다. 바이칼호 자체가 수많은 북방 종족 신화의 탄생지다.

실제 몽골리안은 중앙아시아에만 거주하지 않는다. 고대 몽골리안 후손들은 한국, 일본, 중국 서북부, 중동, 아메리카 등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다.

몽골리안 배경을 가진 종족은 공통적으로 하늘을 모시는 제천의식과 사람을 사랑하는 공동체 생활, 자연친화적인 사고, 영적인 세계관 등을 지니고 있다. 이 같은 원형들은 몽골리안의 생활문화와 심층 무의식의 세계에 용해돼 여전히 남아 있다.

정성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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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백제여 대륙 백제는 말한다. (출처 : 임승국 명지대 교수의 역사입문 이야기)


제가 경희대 영문학 교수시절 때 우연히 중국 25사를 구경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25사 가운데 사기(史記), 전한서(前漢書),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진서(晉書) 다음으로 여섯번째 책이 송서(宋書)입니다.

하루는 윤영춘 박사댁에 놀러갔다가 그 분이 갖고있는 장서 중에서 우연히 이 송서를 끄집어 냈습니다.

윤 박사가 이걸 보라고 권한 것도 아닌데, 제가 펼친 곳이 송서 97권 '백제의 전'이라는 대목이었습니다.

그 기록을 무심코 쭉 읽어 내려갔지요.

 

중국에서 태어나 중학교 4학년까지 그곳에서 성장했으니 한문실력은 그런대로 있어서 쭉 읽어보니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송서에 기록되어있는 백제는 우리가 알고있는 백제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우리는 의례히 백제를 생각할 때면 연상되는 것이 의자왕이고, 의자왕 하면 삼천궁녀, 삼천 궁녀와 낙화암과 백마강, 그리고 다이빙 앤드 풍덩 등입니다.

그런데 송서 97권을 보니까 아예 백제의 위치부터가 달랐습니다. 반도가 아니었습니다.

현 수도인 북경으로부터 남쪽으로는 산동반도를 지나 양자강 남북의 평야지대를 포함한 중국동해안 일대를 백제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 기록을 보고서 그 때 하고 있던 영문학이라는 낡아빠진 학문을 집어 치우고 스승도 안내자도 없이 한국상고사라는 난장판 학문에 뛰어 들었습니다.

 

만 5년동안 학교도 나가지 않고 직장도 없이 도서관에 파묻혀서 사서삼경과 25史와 씨름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6년 만에 다행히 명지대학으로부터 다시 교수발령을 받은 후에, 영문학 교수가 아닌 한국고대사를 강의하는 사학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제 학문의 안내자가 바로 백제사였으니, 오늘 강의하는 것도 백제사의 이해라고 하면 비로소 말문이 열립니다.

 

송서 97권 백제전의 머릿부분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百濟國, 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晉平郡晉平縣.'

 백제국은 본래 고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여리에 함께 있었으며, 그 후 고려는 대략 요동에 있었으며, 백제는 대략 요서에 있었고, 백제가 다스린 곳은, 진평군 (晉平郡) 진평현(晉平縣)이라 불렀다. 요서는 북경을 포함한 하북,하남, 산서 등을 포괄한다. 산서성의 옛이름이 晉이다

송서에만 이런 기록이 있고 다른 기록에는 이런 것이 없다고 한다면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닙니다.

 

25사 중 송서 다음이 양서(梁書)인데, 양서 54권 백제전에도 같은 기록이 나옵니다.

양서 다음은 남제서(南濟書)입니다. 당시 양자강 남쪽에는 제(濟)나라가 있었고, 북쪽에는 북위(北魏)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남제서에도 백제전이 있는데, 그 내용은 더 엄청납니다.

당시의 백제왕은 무령왕의 아버지인 동성왕이었습니다.

동성왕의 무덤이 산동반도에 있다고 25사에 기록되어있고요, 동성왕은 산동반도에 서경(西京)을 설치하여 직접 도읍하면서 대륙을 경영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의 군사·외교정책은 가까이에 있는 위나라와는 전쟁으로 상대하고, 양자강 남쪽의 남제와는 우호관계를 맺는 등의 정책을 폈습니다.

동성왕은 남제의 소도왕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실로 엄청납니다.

아마 간덩이가 작은 사람은 이 글만 보아도 깜짝 놀랄 것입니다.

요서나 진평이라고 했던 백제의 세력이 놀랍게도 남쪽으로 확장되어 북위의 군대와 싸워 이겼고, 또 한 때는 양자강 남쪽까지 점령해 버립니다.

그리고 그 땅을 일곱구역으로 나누어서 백제장군 일곱을 각각 파견하여 통치하게 합니다.

쉽게 말하면 총독 일곱명을 두고 중국동해안을 싸그리 지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록을 중국인들은 다 없애 버렸습니다. 남제서 백제전의 머리부분을 다 뜯어 버렸다는 말입니다.

현재 한국으로 오는 25사 중 남제서를 보면, 백제전의 앞부분이 뜯겨나간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글씨가 없는 공백이 하얗게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게 '똥되는 놈'(지나인)의 심뽀입니다. 오죽하면 똥되는 놈이라고 하겠습니까?

백제전이라는 제목은 있는데 그 다음이 빈칸이란 말이예요.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강시단야(降屍丹野: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붉게 물들였다)인데, 똥되는 놈을 시체로 만든 자는 백제 군대이겠죠. 그리고 그 빈칸은 그냥 남겨두었습니다.


중국본토에는 오리지날 25사가 남아있다고 합니다. 대만에는 물론이고요.

중국본토와 대만에 가공하지 아니한 원본 25사가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흔하지 않지만. 중국 가는 사람들은 오리지날 25사를 구해서 남제서 백제전을 펼쳤을 때, 공백이 아니라 글씨가 꽉 차 있다고 한다면 무조건 갖고와야 합니다.

요즘 중국에 많이 갔다왔다 하는 모양인데 다 소용없어요. 강아지 눈에 보이는 건 누런 똥 밖에 없습니다.

 

근래 중국갔다 온 사람들의 눈에는 누런 황금덩어리만 보일 뿐입니다.

'백제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딱 꼬집어서 얘기할 때는 위와 같은 것이 적절한 예화가 될 겁니다.

백제가 이렇다는 것은 감히 생각을 못합니다. 그저 '낙화암 풍덩'만을 연상할 뿐입니다.


중국지도에 있어 동해안 지역은 사실상 중국땅의 전체나 다름없습니다. 깊은 오지에는 사람 들이 살지를 못합니다.

중국사람들이 집결되어있고 중국문화가 한데 모여 있는 곳이 중국 동해안 지역입니다.

모택동도 여기에 사는 중국인구의 수를 十億에서 二億을 뺀 수억이라고 했습니다.

전체 10억 중에서 (십억에서 이억을 밴 수억)의 인구가 이곳에 몰려 살고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지역을 몽땅 백제가 지배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요즘 남북사학자들이 한 테이블에 모여 토론하자고 하는데, 그건 위험천만한 얘기입니다.

우리 사학계는 아직도 식민사관에 푹 젖어있어서 노태우정권은 또 그런 사람을 뽑을테고, 그래서 '마피아단'을 남한대표로 보내면 북한사학자들한테 비웃음만 당할 것입니다.

 

북한 사학은 60년대 초에 한사군문제를 싹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낙랑현도진번임둔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마주 앉으면 남쪽이 망신당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대한민국 사학의 주류가 민족주의 정예학자로 되기 전에는 위험한 주장입니다.

얼마 전에 KBS에서 사학 관계서류를 모아서 연변대학에 기증을 했습니다. 약 몇 천권 보낸 모양입니다.

 

연변대학 총장이 그걸 받아서 읽어 보니까 식민사관이 그대로 남아있길래, 예를 들어 김철준씨가 쓴 문화사관이나 이기백씨가 쓴 한국사의 무엇 등등이었는데, 무슨 이런 책을 보냈느냐 하면서 모조리 폐기처분해 버렸다고 합니다.

남한에서 보내 온 사서는 모조리 식민사학에 젖어 있어서 폐기처분했다는 사실, 이것만큼 대한민국 망신시킨 적이 어디 있습니까?

해방 이후 40-50년동안 우리는 식민사학을 복창 복습했다는 것을 여기서 또한 알 수가 있습니다.

 

 

대륙백제.. 한반도 '백제' 성씨가 없다!
백제의 8대 성씨는 어디로 갔는가.지금의 산동성을 중심으로 대만에...

 

▲ 정치외교의 주역이었으며, 무역으로 국부를 쌓았던 백제.

그 백제인들의 영역은 한반도의 경계가 아닌 광활한 대륙이었다. 그 가능성을 여는 열쇠는 22개 담로.

 

백제의 8대 성씨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자료가 많지 않아 일부 소개하는 것으로 단순참고 바라며, 좋은 자료가 있으신 분들은 꼭 소개해 주시길 바랍니다

소개순서는

              (1) 임승국 교수 견해
              (2) 남제서의 원문 소개
              (3) 한국의 성씨 통계
              (4) 대만학자의 연구논문 소개
              (5) "국, 진, 연"씨 인구 소개
                                                  입니다.


@논 점
(1) 사서에 기록된 백제 8대 성씨가 존재하는 곳은 중원대륙
(2) 사서에 등장하는 백제 장군의 성씨도 중원대륙에는 있어도 반도에는 없다

먼저 소개하는 글은 1981년 11월26일 ~ 27일 양일간 열린 이틀간의 국회 "국사청문회"에서
고 임승국 교수님이 발표하신 국회 속기록 내용 중 백제 성씨에 관한 발언 부분입니다

(임승국 교수) “백제 일곱장군의 성씨는 중국에 존재한다!

또 백제 7장군의 성씨만 훑어봐도 사학을 아는 사람은 깜짝 놀랄 일이 있어요
왜 그런고 하니 백제에는 본래 8대 성씨가 있는데 중국 25사와 우리 삼국사기는 이렇게 적고 있어요


"백제유 대성팔씨 사씨 해씨 진씨 목씨 국씨 연씨 묘씨(혹 묘씨) 협씨"
"百濟有 大性八氏 沙氏 解氏 眞氏 木氏 國氏 燕氏 (?)씨(或 苗氏) 協氏"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백제 8대 성씨가 현재 남북한을 통틀어 단 한 가구도 남지 않았는데 남제서 백제전의 7장군 성씨들은 대부분 유서깊은 8대 성씨들이라는 사실이예요.(중략)"

다음은 상기한 고 임승국 교수의 발언내용을 뒷받침 하는 사서의 기록인데 중국정사인 남제서에 나오는 기록을 일부 인용하여 소개합니다.

아래 원문을 보면 백제 장군의 이름이 다음과 같다.

(1) 沙法名 사법명
(2) 贊首流 찬수류
(3) 解禮昆 해례곤
(4) 木干那 목간나


이 성씨들이 백제의 주류 성씨였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얼마나 남아 있는지요.
이 자료를 보시는 독자 여러분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안드시는지 궁금합니다. 중국대륙에 흔한 성씨들입니다

아래 자료를 계속 보시길 바랍니다(백제와 위나라의 전투는 대륙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보여짐).

(중국 정사인 25사 중) 『남제서(南齊書)』권58 동남이전(東南夷傳) 동이 백제에 나오는 기록입니다.

(원문)
是歲 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 入其界 (시세 위로우발기수십만공백제 입기계)
牟大遣將 沙法名 贊首流 解禮昆 木干那 率衆襲擊虜軍 大破之 (모대견장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 솔중습격로군 대파지)


(
해설)
① 이 해에 (490년, 동성왕 12년)
위나라 오랑캐가 또다시 기마병 수십만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그 국경에 들어가니,
② 모대(牟大)가(백제 24대 동성왕)
장군 사법명(沙法名)·찬수류(贊首流)·해례곤(解禮昆)·목간나(木干那)를 파견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오랑캐군을 기습,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무찔렀다.

 

(해설 주)
① 이 해(是歲):남제(南齊)영명 8년 = 490년 = 백제 동성왕 12년
② 모대:백제 제24대 동성왕東成王(479∼501)

 

 

(백제 7태수의 위치와 이름)
 광양태수 : 고달 → 후에 대방태수가 됨
 조선태수 : 양무 → 후에 광릉태수가 됨 → 후임 "장색"
 대방태수 : 고달(前 광양태수)
 광릉태수 : 양무(前 조선태수)
 청하태수 : 회매
 낙랑태수 : 모견
 성양태수 : 왕무


그런데 이 백제의 성씨 부분을 국내에서 전문적으로 연구한 자료가 없어, (사)한배달에서 대만대교수인 진첩선씨의 글을 인용하여 “백제 8대 성씨에 대해”라는 자료를 소개하고 있는데 아래와 같습니다.
이 자료를 참고하여 백제 8대성씨에 대한 의문을 풀어나가는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이것을 대륙백제의 흔적이라 한다면 “뭐라 하는 이”들이 많겠지요(^.^)

(한국의 성씨 통계)

한반도에는 백제 성씨가 없다. 한국의 성씨 통계를 보면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신,구당서나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경우 2백 여개의 성(城)과 76만호(戶)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래자료를 보시면 알겠지만 백제 8대 성씨 중 국(國)씨와 진(眞)씨를 제외한 6대 성씨가 한반도에는 없다.
무슨이유일까 ?
그나마 남아 있는 국(國)씨와 진(眞)씨 성도 희귀성이다. 몇 가구 남아 있지를 않다. 왜일까 ?

(성씨관련 순위
http://www.shinjongwoo.co.kr/html/area_name.html)

 

위 자료를 보면 한국의 성씨 중 100위는 예(芮)씨로, 1985년 조사에서는 가구수 2,574가구로 274성 중 제100위에 랭크 되어 있다.

백제의 8성 중 단 하나의 성씨도 100위 이내에 들어있지 못하다. 백제의 주류 성씨였는데 말이다.
그나마 8개 성 중 진(眞)씨가 151위, 국(國)씨가 159위로 2개가 남아 있다.
산동성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남아있는 백제 8대 성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주) 상기 사이트에는 안 나타나지만 다른 사이트에는 연(燕)씨가 104명 있는 것으로 나온다. (제일 마지막 자료 참고)

진씨 1,511명
국씨 978명
연씨 104명

“대륙백제의 흔적”은 아닐까 ?

 


백제의 8대 성씨에 대해
(출처 : 한배달 1992년 6월호)

주의사항> 한배달은 동자료를 소개하면서
“이 글은 대만학자의 글을 번역한 것으로 국내에 백제 8성에 대한 연구가 없어 게재하는바 특히 아전인수격인 논조임을 염두에 두고 읽기 바람“이라는 당부사항을 적시 하고 있으므로 감안하여 보아주길 당부합니다.

내용요약> 한배달은 결론에
백제의 8성이 우리나라엔 많지 않지만, 지금의 산동성을 중심으로 대만에 더 많은 성씨가 존재한다는 것은 백제의 위치와 더불어 재삼 숙고하여야 할 문제라고 지적한다.

본문중 특이사항은 다음과 같다.
(1) 사(沙)씨는 산동성과 하남성에 나온 2가지가 있다고 소개하고 있으며
(2) 협(協)씨는 음이 려(黎)라고 한 것으로 보아, 혹시 치우천자의 “구려(九黎)”와의 연관성이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3) 해(解)씨는 산서성 지명을 성씨로 만든 것이라 한다
(4) 진(眞)씨는 원래 신(愼)씨에서 바꾼 것이라 한다.

 

보충자료 성씨 자료에 나타난 국씨, 진씨, 연씨 인구수 (출처 http://www.anyroot.com)

<진씨眞氏>

진씨(眞氏)는 중국(中國) 상곡(上谷)에서 계출(系出)된 성씨이며, 우리나라에서는 백제 8대 성의 하나로 알려졌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백제(百濟) 고이왕(古爾王) 때 내두좌평(內頭佐平)을 지낸 진 가(眞 可)라는 사람과
동성왕(東城王) 때 병관좌평(兵官佐平)에 오른 진 로(眞 老),
삼근왕(三斤王) 때의 좌평(佐平) 진 남(眞 男),
아신왕(阿莘王) 때의 병관좌평(兵官佐平)에 오른 진 무(眞 武),
근초고왕(近肖古王) 때 조정좌평(朝廷佐平)을 역임한 진 정(眞  淨)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신라(新羅) 때도
진 공(眞 功)이 신문왕(神文王) 때 대아찬(大阿 )을 지냈고, 진 복(眞 福)은 상대등(上大等)을 지냈다고 한다.

고려 때 와서는
925년(태조 8) 견훤(甄萱)이 진 호(眞 號)를 고려에 볼모로 보낸 사실이 문헌(文獻)에 나타나 있다.
  
진씨(眞氏)의 본관(本貫)은 서산(西山) 단본(單本)이며,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292 가구, 151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985년 현재 人口) 1,511명이 있다.

 


<국씨國氏>


국씨(國氏)의 본관은 담양(潭陽)·풍천(豊川)·현풍(玄風)·영양(英陽)·김해(金海)·대명(大明) 등이 문헌에 전해지고 있지만
시조와 연원에 대해서는 미상이다.
국씨는 본래 백제의 8대성(八大姓)인 사(沙)·연(燕)·예(예)·해(解)·진(眞)·국(國)·목(木)·백(백) 중의 하나이다.

역사상의 인물로는
백제의 대신으로 611년(무왕 12) 수(隋)나라에 들어가 공물을 바치고 고구려 정벌을 의논한 국지모(國智牟),
고려 태조 때 원외랑(員外郞)인 국현(國 ) 등이 있는데 오늘날의 국씨와의 관계는 확실하지 않다.
  
1930년 국세조사 당시
평남 강서군에 담양국씨(潭陽國氏) 4가구와 함남 영흥군에 풍천국씨(豊川國氏) 3가구 및 함남 단천군에 전주국씨(全州國氏) 1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985년 현재 人口) 
978명이 있다.
 

<연씨燕氏>

연씨(燕氏)는 원래 중국(中國) 범양(范陽)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주(周)나라 때 공자(孔子)의 제자(弟子)인 연 급(燕 伋)의 후손이 나라 이름을 성(姓)으로 삼은 것이 시초가 되었다. 
  
우리 나라 연씨(燕氏)는 백제(百濟)의 8대 성(姓)으로 손꼽혔으며「삼국사기(三國史記)」에 성왕(聖王) 때 병관좌평(兵官佐平)을 지낸 연 실(燕 實) 등 연씨(燕氏)가 나오지만 시조 및 연원(淵源)은 알 수 없다.
  
본관(本貫)은 정주(定州) 외에 영평(永平)·전주(全州)·평주(平州 : 평산의 별호)·곡산(谷山)·덕원(德原)·장곡(長谷) 등이 문헌에 나타나 있다.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정평(定平)·영흥(永興)·이원(利原) 등 이북에 22가구가 있었고 남한에 3가구가 살고 있었으며,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26가구, 10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985년 현재 人口)
104명이 있다.

 


---> 백제의 8대 대성이라 하였는데 200여개의 성터와 76만호의 인구 중 대부분을 차지하던 8대 성씨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어디가 백제 본토인가?

 

 

 

 

# 임승국 교수의 역사 사설

 

漢四郡 사건'의 실상과 朝鮮四郡  

 

저는 백제사를 연구한 사람이고, 주로 학계에서도 제가 주장한 것은 백제사입니다. 그래서 제가 강단에 서면, '저사람, 백제사 얘기한다'라고 아주 판이 박혀 있어요. 백제사 얘기를 하도 많이 하다보니 이제는 저 자신도 판에 박혀 버렸나 봅니다. 오늘 한사군과 백제사를 강의하기로 되어있는데, 여기 오신 여러분들도 한사군에 대해 아주 깊은 인식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엊저녁에 정신문화원 원장(김철준)이 죽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한국의 마피아 두목 알카포네'가 죽었어요. 아마 지금쯤 그 빈소에 드나드는 사람은 '마피아 잔당'일 겁니다. 그는 생전에 나하고는 피맺힌 원수였습니다. 고인이 된 사람한테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매우 안되었습니다만, 漢四郡얘기가 나오면 그 분 얘기를 안할 수가 없네요.

 

김철준은 '漢四郡이 있었다'는 사실이 한국사 발전을 위해서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Thanks very much for 한사군', 다시 말해서 한사군 수위론자였습니다. 그런데도 신문에는 식민사관 청산을 위해 평생토록 노력한 민족사학자로 보도되었습니다. 신문기자들 신문쓰는 것 보면 기가 막히게 내 놓습니다. 국회에서 저와 김철준이 싸웠던 그 현장을 방청했던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런 기사는 못썼을 겁니다.

 

여기서 한사군에 대해서는 간략히 알아보겠습니다. 현재까지 학계에 남아있는 한사군의 설치문제, 도대체 한사군의 설치연대가 언제입니까? 서기전 108년이요. 좋아요. 그러면 서기전 108년에 설치된 낙랑·현도·진번·임둔이라는 4군 가운데 가장 오래 존속된 것은 무슨 군이죠? 낙랑군입니다. 낙랑군의 멸망연대는 언제입니까, 그럼? 313년! 전부 박사들만 모였네! 설치에서 멸망까지 도합 421년입니다. 중국의 역대왕조 가운데 하나의 왕조가 400년 이상 존속한 것이 몇개나 됩니까? 단 한개도 없습니다. 그럼 300년 이상 존속한 왕조는 몇개나 될까요? 그것도 없습니다. 한국에는 500년 이하의 왕조가 거의 없습니다.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우리는 이하가 없고 중국은 이상이 없습니다. 여기서부터 우선 역사의 질(質)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200년에서 250년 사이의 왕조가 4개 있었는데, 즉 한(漢)·당(唐)·송(宋)·명(明)나라입니다. 그런데 한사군의 종주국가는 한나라입니다. 한나라는 서기 8년에 망합니다. 그러면 종주국인 한나라가 망해 버린 때부터 305년동안 종주국이 없는 식민지가 과연 존재할 수 있었겠습니까? 도저히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낙랑군이 평양에 실존했었다는 것은 실사(實史)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건 동화 같은 얘기입니다. 아니 국민학교 학생한테 물어보아도 알 수 있는 얘기를 대학생한테 얘기해야 하는 저도 참 바보 같군요.

(+허구의 종족 짱골라 왕조는 한, 송, 명 3왕조 뿐입니다. 이를 제외한 나머지 왕조들은 모두 이민족들이 세운 것이죠. 수나라와 당나라는 흉노계 선비족 왕조이며 진시황의 진나라마저도 서융계 국가입니다. 청나라 역시 고구려와 발해 후예인 여진족 왕조입니다.)

 

여기서 저는 학문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라 상식을 말하는 겁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종주국가가 서기 8년에 망했는데, 그 식민지는 313년까지 존속했다는 것이 동화입니까, 역사입니까? 역사도 동화도 모두 아닙니다. 동화는 논리가 없어도 되는 겁니까? 오히려 동화야말로 어린애들이 알아듣기 쉽게 논리가 정연해야 됩니다. 김철준은 이런 논리가 없는 얘기를 실사라 했고, 또 한사군이 있어서 무척 고마워했습니다. 그런 논리를 평생 펴다가 어제 죽었습니다. 한국사의 발전을 위해서는 경하할 일입니다. 고인이 된 사람한테는 인간적으로는 안되었지만, 한국사의 발전이라는 또 다른 측면으로 봐서는 아주 축하할 일입니다.

 

어찌되었건 한사군 얘기는 이제 끝난 얘기입니다. 금년부터 중학교 국사책에서 한사군을 없애겠다고 정부에서 공언을 했습니다. 내년부터는 고등학교 국사에서도 없애기로 방침이 정해졌습니다. 앞서 강의하신 박시인 박사도 한사군을 위해 참으로 많이 애썼습니다. 도대체 학문이 되지 않는 사안을 가지고 해방 후 40년동안 떠들어 온 것입니다. 사기(史記)라는 사서는 한무제(漢武帝)의 신하였던 사마천이 쓴 목격기입니다. 사기가 완성된 때가 서기전 100년입니다. 사마천의 그 때 나이 27살이었습니다. 약관의 27세 때 한사군 전쟁을 직접 보고 적은 기록이 조선열전(朝鮮列傳)입니다. 사기 조선열전에는 낙랑, 현도, 진번, 임둔이라는 4군이 없습니다. 사학에서는 이런 자료를 1차사료라고 합니다. 1차사료인 목격담 속에 낙랑현도진번임둔이 없는데, 우리는 뭐가 아쉬워서 자꾸 그 이름들을 외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기 다음에 쓰여진 중국정사가 한서(漢書)입니다. 한서는 서기 80년 경에 쓰여졌는데, 한사군 사건으로부터 말하면 200년이 채 안되는 180년 이후에 쓰여진 기록입니다. 그런데 한서는 사기의 조선열전을 복사기로 복사를 해 놓은듯 똑같이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한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기 조선열전의 '수정조선위사군(遂定朝鮮爲四群)'이라는 기록을 '수멸조선위낙랑현도진번임둔(遂滅朝鮮爲樂浪玄兎眞番臨屯)'으로 바꾸어놓았다는 점입니다. 어떤 사람(반고)이 8글자를 가필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한서에서부터 '낙랑현도진번임둔'이라는 8글자가 나온 것입니다.

 

남대문을 구경한 사람이 서울얘기를 하는 것과 남대문 구경도 못한 사람이 서울 얘기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정확하겠습니까? 그러니까 한사군 전쟁이 일어난 시절에 태어나지도 않았던 반고(班固)가 적은 한서(漢書)가 정확하겠어요, 아니면 한사군 전쟁이 났을 때 한무제의 신하였던 약관 27세의 사마천이 적은 기록이 정확하겠습니까? 게다가 사기 조선열전의 기록을 볼 것 같으면, 우리가 상상하는 한사군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기록이 나옵니다.

 

한국사람의 마음 속에는 '한국은 외국과 싸우면 의례히 진다'라는 패배의식이 한국사관에 의해 알게모르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중고등학교나 대학에 와서 배운 역사라는 것이 전부 싸움에서 지는 것이었습니다. 한무제의 육해양군(兩軍)과 위만조선의 군대가 싸웠으니까, 보나마나 또 졌겠지 하는 생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싸움에 진 결과로 이긴 자가 설치한 것이 낙랑현도진번임둔이라는 식민지였다는 것입니다. 저 김철준은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그게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한무제의 군대와 위만조선의 군대가 싸웠는데, 우리의 예상을 뒤엎고 한무제의 군대가 졌습니다. 그러나 사마천의 사기에는 '조선이 이겼다'는 얘기는 없습니다. 전쟁이 일년동안 지속되다가 끝나고 난 뒤, 한무제는 논공행상을 합니다. 육군사령관 순체, 해군사령관 양복(楊僕), 천자의 사신인 공손수(公孫遂)와 위산(衛山) 등 네사람을 앞에 대령시켰습니다. 만약 이들이 전쟁에 이긴 개선장군이라면 계급을 높여주거나 황금으로 상을 주었을 겁니다. 그런데 상은 커녕 벌을 내립니다. 벌 가운데에서도 최고의 벌인 사형을 내립니다. 사형 중에서도 최고의 사형을 내립니다. 제일 악랄한 사형, 조선조 같으면 능지처참에 해당되는, 사람을 죽여 사지를 찢어서 중국의 장안 사대문에 걸어놓는 사형[棄市]을 내려 죽입니다. 네사람 중 천운(天運)이 기시(其時)한 사람도 살아남질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논공행상 하나만 보더라도 한나라가 전쟁에 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마천은 이렇게 자기 한나라가 졌다고 했는데, 우리 한국인은 오히려 우리가 졌다라고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통터질 일입니다.

 

그리고 한사군이 아니라 조선사군이 생겼습니다. 평주·날양·추저·홰청이라는 네군의 책임자(최, 참, 음, 협)가 전부 조선사람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거꾸로만 알고 세상을 살아왔니다. '한사군 사건'이야말로 우스꽝스런 사건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제일 마지막에 가서 '태사공 왈(太史公 曰)'이라고 한 부분이 있는데, 아주 중요한 대목입니다. 뭐라고 했는가 하면, '한나라의 육해양군은 모두 졌다'라고 했습니다. 사마천이 자기의 한나라가 싸움에 졌다고 했는데, 김철준이 나와서 '아니다, 우리가 졌다'라고 하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진 걸로 생각해 왔던 것입니다. 전쟁에 직접 참여한 사마천 자신이 '육해양군이 모두 졌다(兩軍俱辱 將率莫侯矣)'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세상만사 본은 무상하다라고 탄식하며 조선열전의 붓 끝을 놓았습니다. 이런 기록을 보면서도 한사군얘기를 하는 사람은 도저히 정상인으로 볼 수 없는, 장님과 하등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서울대학에서 한사군을 얘기하는 사람이 또 한 사람 있습니다. 아직 사십도 안된 젊은 사람인데, 젊은 놈을 두드려 팰 수도 없고 해서 분통이 터집니다. 발해연안에서 산동반도에 걸쳐 평주, 추저, 날양, 홰청이라는 사군이 설치되었는데, 바로 이땅이야말로 위만조선의 땅입니다. 위만조선이 무너지면서 그 땅이 조선사람 네사람이 통치하는 조선사군으로 바뀐 것입니다. 위만조선 이전에는 그 곳이 기자조선의 땅이었습니다. 한국사를 논하면서 한반도는 언급하지 않고 왜 만주쪽을 가리키느냐 할 지 모르겠지만, 한국사의 본질은 반도사관이 아니라 이처럼 대륙사관입니다. 일본사람들이 반도사관에 역점을 두어 반도라는 것이 우리의 운명적인 강역인 것처럼 강의했습니다.

 

지금 국회의원들도 하등 다를 바 없습니다. 헌법개정하면서 반도 얘기하지 말라고 그렇게 강의했는데, 지금의 헌법3조를 보면 우리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로 되어있습니다.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 이것이 우리의 숙명적인 강역인 것처럼 알고있는 것입니다. 한반도는 왜인들이 우리의 머리 속에 심어놓은 강역일 뿐입니다. 한반도라는 것은 우리 민족사의 가호적입니다. 고려 이전에는 모두가 대륙에서 생겨난 역사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가호적이 본호적으로 둔갑되어있는 것입니다. 이제 한국사는 반도사관이 아닌 대륙사관으로 보아야 합니다. 고구려나 백제, 신라도 그 건국의 땅이 모두 대륙입니다.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백제사는 더우기 대륙의 역사입니다. 그러니까 한국사학자들이 사기연표에 실려있는 조선사군의 이름이나 강역 등을 연구해서, 지금까지 한사군이 점하고 있던 그 블랭크를 메워야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한국사학계가 할 일이 많은 것입니다. 한사군과 관련된 얘기는 이 정도로 끝내고 백제사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百濟史


대방이라고 하면 보통 황해도 사리원으로 알고들 있습니다.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을 쓴 김성호씨는 나름대로 식민사관을 비판하면서 글을 썩 잘 썼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가지 잘못한 것은 사리원이 대방이라고 한 것입니다. 즉 일본사람들이 한 얘기를 그대로 고스란히 믿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백제시건국어대방고지(百濟始建國於帶方고지)'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백제가 처음 나라를 세운 땅이 대방이라는 뜻인데, 대방이 황해도 사리원이니까 사리원에서 백제가 건국한 것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사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흠이 있다고 해도 공격할만한 흠은 아니지만, 백제사 출발점은 대륙인데, 황해도 사리원에서 출발했다고 하니 참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학계에서는 미추골을 미추홀이라고 합니다. 홀(忽)자를 역사에서는 골이라고 읽습니다. 밤골이다 무슨 골이다 할 때처럼, 고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김성호씨는 이 미추골을 인천이 아니라 아산면 인주면이라고 했습니다. 미추골이 인천이라는 것도 마땅치 않은데, 거기에서 더 내려가 아산면 인주면이라고 했는데 이해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미추골의 위치는 바로 하북성입니다. 하북성에 있는 미추골에서 비류수가 흐릅니다. 비류백제라고 할 때의 비류수가 바로 거기서 흐릅니다.

 

우리 사학계는 정말 답답합니다. 오죽 답답하면 제가 유신정권 때 정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벌였겠습니까? 국사를 바로 잡으라고 행정소송을 했을 때, 원고는 명지대 교수 임승국이 되고 피고는 박정희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학계에서는 저보고 미쳤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소송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요? 결과는 '피고 패소, 원고 승소' 이렇게 났습니다. 제가 이겼습니다.

 

그래서 그 때 판결장을 들고 문교부장관을 찾아가 집행할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피고가 억울하다고 대법원에 항고를 했습니다. 문교부에서는 아직 사건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집행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마지막 판결날짜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꼭 일주일 남겨두고 박대통령이 피살당해 버렸습니다. 조금 뒤 대법원에서, 그 재판은 피고의 유고로 인하여 무기한 연기한다는 통지가 왔습니다. 그 때의 무기연기가 지금까지도 무기연기 중입니다. 대법원장이 몇 번이나 바뀌고 정권이 몇 번 바뀌었는데도 지금까지 무기연기라니, 이거 법이론상 맞지 않는 얘기가 아닙니까? 그래서 이번 국정감사 시, 모 국회의원에게 그것을 좀 알아봐 달라고 했더니 그 국회의원이 하는 얘기인 즉, 그 재판은 판결하지 않은 채 폐기처분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폐기하려면 원고의 동의가 있어야 하는 법인데, 하기야 뭐 5공화국시절이니까 법이 없었죠.

 

저는 억울한 나머지 국회에 청원서를 냈습니다. 그래서 청원서에 입각한 공청회가 열렸지요. 앞서 강연한 박시인 박사, 안호상 박사와 함께 셋이서 공청회에 나가 열변을 토했습니다. 박시인 박사는 사람이 너무 좋아서 투쟁형이 못되어 제가 대표격으로 싸웠습니다.

 

제안설명을 하면서 "낙랑현도진번임둔의 증거는 무엇인가?"라고 물었더니 문교부 장관이 하는 말이, 자기는 역사학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답변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국무위원이 반드시 역사학 공부를 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없기 때문에 그냥 넘어 갔습니다. 그 다음 앉은 사람이 차관인데,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던 사람이었어요. 그 사람은 사학은 고사하고 인문사회과학계통이 아닌 자연과학계통을 공부한 사람이라 내가 차관에게 질문하면, 그 사람은 속으로 '저 양반이 나 망신줄려고 국회에 불러온 것 아니냐'할 것 같아서 그냥 뛰어 넘었습니다.

 

다음은 국사편찬위원장이 나왔습니다. 3년동안 행정소송을 할 때 대통령 대리인으로 피고석에 있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도 장관과 꼭같은 답변을 하길래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국사편찬위원장이라는 직위에 있는 사람이 무책임한 발언을 하니 너무 화가 치밀었습니다. 그 때 방청석에 있던 국회의원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국사편찬위원장 임명권자인 문교부장관은 사임하라고 외쳤습니다. 목표는 국사개정인데 인사문제로 번지니 다시 한번 더 국사개정의 방향에서 일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한 뒤, 장차관과 국사편찬위원장도 한사군 문제를 공부안했다고 발뺌하니 앞서 얘기한 대로 쭉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국사개정을 하기로 결정하고 공청회는 끝났습니다.

 

이제 백제사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제 전공이 백제사이고 백제사는 그야말로 저의 의중의 역사입니다. 제가 경희대 영문학 교수시절 때 우연히 중국 25사를 구경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25사 가운데 사기(史記), 전한서(前漢書),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진서(晉書) 다음으로 여섯번째 책이 송서(宋書)입니다. 하루는 윤영춘 박사댁에 놀러갔다가 그 분이 갖고있는 장서 중에서 우연히 이 송서를 끄집어 냈습니다. 윤 박사가 이걸 보라고 권한 것도 아닌데, 제가 펼친 곳이 송서 97권 '백제의 전'이라는 대목이었습니다. 그 기록을 무심코 쭉 읽어 내려갔지요. 중국에서 태어나 중학교 4학년까지 그곳에서 성장했으니 한문실력은 그런대로 있어서 쭉 읽어보니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송서에 기록되어있는 백제는 우리가 알고있는 백제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우리는 의례히 백제를 생각할 때면 연상되는 것이 의자왕이고, 의자왕 하면 삼천궁녀, 삼천궁녀와 낙화암과 백마강, 그리고 다이빙 앤드 풍덩 등입니다.

 

그런데 송서 97권을 보니까 아예 백제의 위치부터가 달랐습니다. 반도가 아니었습니다. 현 수도인 북경으로부터 남쪽으로는 산동반도를 지나 양자강 남북의 평야지대를 포함한 중국동해안 일대를 백제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 기록을 보고서 그 때 하고 있던 영문학이라는 낡아빠진 학문을 집어 치우고 스승도 안내자도 없이 한국상고사라는 난장판 학문에 뛰어 들었습니다. 만 5년동안 학교도 나가지 않고 직장도 없이 도서관에 파묻혀서 사서삼경과 25史와 씨름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6년 만에 다행히 명지대학으로부터 다시 교수발령을 받은 후에, 영문학 교수가 아닌 한국고대사를 강의하는 사학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제 학문의 안내자가 바로 백제사였으니, 오늘 강의하는 것도 백제사의 이해라고 하면 비로소 말문이 열립니다. 송서 97권 백제전의 머릿부분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百濟國, 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晉平郡晉平縣.' 송서에만 이런 기록이 있고 다른 기록에는 이런 것이 없다고 한다면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닙니다. 25사 중 송서 다음이 양서(梁書)인데, 양? ?54권 백제전에도 같은 기록이 나옵니다. 양서 다음은 남제서(南濟書)입니다. 당시 양자강 남쪽에는 제(濟)나라가 있었고, 북쪽에는 북위(北魏)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남제서에도 백제전이 있는데, 그 내용은 더 엄청납니다.

 

당시의 백제왕은 무령왕의 아버지인 동성왕이었습니다. 동성왕의 무덤이 산동반도에 있다고 25사에 기록되어있고요, 동성왕은 산동반도에 서경(西京)을 설치하여 직접 도읍하면서 대륙을 경영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의 군사·외교정책은 가까이에 있는 위나라와는 전쟁으로 상대하고, 양자강 남쪽의 남제와는 우호관계를 맺는 등의 정책을 폈습니다.

 

동성왕은 남제의 소도왕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실로 엄청납니다. 아마 간덩이가 작은 사람은 이 글만 보아도 깜짝 놀랄 것입니다. 요서나 진평이라고 했던 백제의 세력이 놀랍게도 남쪽으로 확장되어 북위의 군대와 싸워 이겼고, 또 한 때는 양자강 남쪽까지 점령해 버립니다. 그리고 그 땅을 일곱구역으로 나누어서 백제장군 일곱을 각각 파견하여 통치하게 합니다. 쉽게 말하면 총독 일곱명을 두고 중국동해안을 싸그리 지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록을 중국인들은 다 없애 버렸습니다. 남제서 백제전의 머리부분을 다 뜯어버렸다는 말입니다. 현재 한국으로 오는 25사 중 남제서를 보면, 백제전의 앞부분이 뜯겨나간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글씨가 없는 공백이 하얗게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게 '똥되는 놈'(지나인)의 심뽀입니다. 오죽하면 똥되는 놈이라고 하겠습니까? 백제전이라는 제목은 있는데 그 다음이 빈칸이란 말이예요.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강시단야(降屍丹野: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붉게 물들였다)인데, 똥되는 놈을 시체로 만든 자는 백제 군대이겠죠. 그리고 그 빈칸은 그냥 남겨두었습니다.

 

중국본토에는 오리지날 25사가 남아있다고 합니다. 대만에는 물론이고요. 중국본토와 대만에 가공하지 아니한 원본 25사가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흔하지 않지만. 중국 가는 사람들은 오리지날 25사를 구해서 남제서 백제전을 펼쳤을 때, 공백이 아니라 글씨가 꽉 차 있다고 한다면 무조건 갖고와야 합니다. 요즘 중국에 많이 갔다왔다 하는 모양인데 다 소용없어요. 강아지 눈에 보이는 건 누런 똥밖에 없습니다. 근래 중국갔다 온 사람들의 눈에는 누런 황금덩어리만 보일 뿐입니다. '백제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딱 꼬집어서 얘기할 때는 위와 같은 것이 적절한 예화가 될 겁니다. 백제가 이렇다는 것은 감히 생각을 못합니다. 그저 '낙화암 풍덩'만을 연상할 뿐입니다.

 

중국지도에 있어 동해안 지역은 사실상 중국땅의 전체나 다름없습니다. 깊은 오지에는 사람들이 살지를 못합니다. 중국사람들이 집결되어있고 중국문화가 한데 모여 있는 곳이 중국 동해안 지역입니다. 모택동도 여기에 사는 중국인구의 수를 8억이라고 했습니다. 전체 10억 중에서 8억의 인구가 이곳에 몰려 살고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지역을 몽땅 백제가 지배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요즘 남북사학자들이 한 테이블에 모여 토론하자고 하는데, 그건 위험천만한 얘기입니다. 우리 사학계는 아직도 식민사관에 푹 젖어있어서 노태우정권은 또 그런 사람을 뽑을테고, 그래서 '마피아단'을 남한대표로 보내면 북한사학자들한테 비웃음만 당할 것입니다. 북한 사학은 60년대 초에 한사군문제를 싹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낙랑현도진번임둔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마주 앉으면 남쪽이 망신당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대한민국 사학의 주류가 민족주의 정예학자로 되기 전에는 위험한 주장입니다. 얼마 전에 KBS에서 사학 관계서류를 모아서 연변대학에 기증을 했습니다. 약 몇 천권 보낸 모양입니다. 연변대학 총장이 그걸 ? 騁티?읽어 보니까 식민사관이 그대로 남아있길래, 예를 들어 김철준씨가 쓴 문화사관이나 이기백씨가 쓴 한국사의 무엇 등등이었는데, 무슨 이런 책을 보냈느냐 하면서 모조리 폐기처분해 버렸다고 합니다. 남한에서 보내 온 사서는 모조리 식민사학에 젖어 있어서 폐기처분했다는 사실, 이것만큼 대한민국 망신시킨 적이 어디 있습니까? 해방 이후 40-50년동안 우리는 식민사학을 복창 복습했다는 것을 여기서 또한 알 수가 있습니다.

 

고쳐야 할 事大主義


시간이 조금 더 남았으니, 그럼 '똥되는 놈'얘기를 조금 해 보겠습니다. 오늘 제가 자꾸 똥되는 놈이라고 해서 미안하지만, 국호문제에 있어서 중국(united states of china)이라고 부르면 안됩니다. 똥되는 놈이 우주의 가운데, 즉 태양이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제후국이 됩니다. 이것은 아주 원초적인 사대주의 발상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니 중국이라 하지 말고 지나라고 瞞?됩니다. 이웃 일본인도 지나라고 하고 서양사람들도 차이나라고 하는데, 유독 우리만 중국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잘생긴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에 나와있는 '나라말씀이 중국과 달라....'라는 구절도 사대주의적 발상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중국은 '나라 안(=국중)'이란 뜻이 더 강합니다. 나라 안 즉 국내의 백성들이 말이 안 통한다는 뜻으로. 중국이란 국명은 20세기중반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말입니다.  

 

한글을 위해 평생을 살겠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한글만 우리 글자입니까? 아니 우리 역사가 몇년인데 한글만 우리 글자입니까? 우리 문화사가 500년밖에 안됩니까? 서양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니까 한자를 중국글자(Chinese character)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서양 중심의 가치관에서 하는 말이고, 이제부터의 세계는 우리 중심의 문화세계, 우리 중심의 가치관이 전개되어야 합니다. 저는 과거에 알파벳을 가르칠 때 영문학 교수였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백인종이 모여 세운 나라가 USA인데, 앵글로 색슨족이 주류족입니다. USC라고 하면 차이나를 말합나다. 똥되는 놈들 민족 가운데 주류족은 USA의 앵글로 색슨족에 해당되는 한족(漢族)입니다. 이 한(漢)은 민족의 이름도 나라의 이름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한테서 표절을 해 갔습니다. '한'(桓, 원음은 '환')에서 한이라는 발음을 따 갔던 것입니다. 이 한(桓)은 한족(漢族)이 아닙니다. 동이족(東夷族)입니다. 중국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이 동이족입니다. 여기서 이(夷)자를 흔히 오랑캐라고들 합니다. 중국 25사 가운데 우리나라 역사를 기록한 제목이 동이열전(東夷列傳)인데, 여기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전부 다 나옵니다. 그러면 그 후손인 우리는 전부 오랑캐가 되어 버립니다. '나는 오랑캐 올시다'라는, 성은 오씨요 이름은 랑캐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고쳐야 할 사대주의 사상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세종대왕의 중국이라는 용어도 문제이지만, 이(夷)자를 오랑캐라고 훈을 붙인 옥편의 저자는 더 문제가 많습니다. 한문옥편의 원조가 되는 것은 허신(許愼)이 쓴 설문해자(說文解字)인데, 이 옥편의 역사가 약 2000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夷)자를 찾아보면, '동방지인야(東方之人也)' 그 다음에 '고문인동(古文仁同)'이라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랑캐란 말은 없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혹시 누가 이(夷)를 오랑캐로 말하면, 여러분들은 그들에게 '古文仁同'이라는 한마디로써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동양오행철학에 의하면 木은 東, 火는 南, 金은 西, 水는 北, 土는 中央에 해당됩니다. 오행을 색깔로 말하면 東은 靑, 西는 白, 南은 赤, 北은 玄이고 中央은 黃입니다. 오상(五象)을 방위에 배치하면 仁은 東, 禮는 南, 義는 西, 智는 北, 信은 中央입니다. 동양철학 속에서 그 근거를 지니고 있는 글자인 仁을 오랑캐라고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동이족이야말로 중국대륙 가운데 가장 비옥한 땅에서 사는 민족이었고,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지역을 백제가 경영했습니다. 따라서 중국민족 가운데 가장 많은 민족이 동이족이고, 동이족은 즉 우리 선조들은 지나라는 연합민족국가를 형성한 원료입니다. 우리의 5000년 역사가 중국문화의 지류를 따라 흘러서 겨우 마시고 살아 연명해 온 역사라고 붓놀리는 사람들이 그따위 수작을 해 왔지만, 우리 민족이 과연 끊어질듯 끊어질듯 하면서도 목숨을 겨우 연명해 온 민족입니까? 그렇치가 않습니다. 동양의 역사문화 속에서 질풍노도와 같이 군림한 역사문화민족이 우리입니다. 우리가 알맹이요, 핵심입니다. 이제부터는 반대로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자는 지나의 글자가 아니라 우리 글자입니다. 약 4만 3천여 자가 옥편 속에 있는데, 글자 하나 하나마다 대개 발음기호가 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學'자를 옥편에서 찾아보면, 우리는 '學'이라는 발음기호를 적었을테고, 지나인은 한글을 모르니까 자기네 발음기호를 적었습니다. 즉 '轄覺切'으로 표시되어있습니다. 여기서 '切'은 '轄覺切'이 발음기호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읽는 방법은 아주 간단한데, 첫글자에서는 자음(하)만 취하고 두번째 글자에서는 모음(가)과 받침(가)을 취해 읽으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轄覺切'로 중국옥편에는 2000년동안 적혀 내려오고 있는데, 지나인은 '學'발음을 못하고 '쉬에'라고 합니다. 가,띵,밑으로 끝나는 글자를 사성 중 입성이라고 하는데, 지나인은 입성을 발음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한문자(漢文字)는 지나인들이 제대로 발음할 수 없는 것이고, 한민족의 발음으로서만이 완벽히 소리낼 수 있는 것입니다. 100% 우리말로 적혀있는 것이 지나인의 옥편이고, 따라서 우리가 표준어를 쓰고 있는 한문자의 주인공입니다. 한글만이 우리문자가 아니란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한문자야말로 우리 문화와 전통을 지금까지 전해준 고마운 글자입니다.

 

민족사의 르네상스를 위하여


정말 우리 문화의 본질을 정확하게 안다면 이제부터 한자에 대한 애착을 가져야 합니다. 마치 어떤 탕자의 비유마냥 말이죠. 백백만장자의 아들이 아버지의 돈을 객지에서 다 써 버려서, 남의 돼지우리에 버린 밥껍질로 주린 배를 채우다가 하루는 탄식합니다. '나의 아버지집에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많이 있었건만, 나는 객지에서 헐벗고 굶어죽게 되었구나' 하며 깊은 한숨을 쉽니다. 이런 탄식끝에 이 탕자는 아버지의 집을 향해 다시 힘차게 뛰어갑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목을 끌어앉고 맞으며, '내 아들이 다시 돌아왔노라'하며 양잡고 소잡아 축제를 엽니다. 그래서 탕자는 또다시 백만장자가 됩니다.

 

바로 이것이 르네상스입니다. 옛집으로 되돌아 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과연 그런 용기가 있습니까? 옛집을 기억은 하고 있습니까? 옛집이라는 것은 상고사입니다. 이제 상고사를 재확인하고 민족사의 과제인 옛집으로 돌아가는 것, 마치 탕자가 자기 본래의 집을 향해 돌아가는 것처럼, 바로 이것이 한국사의 남아있는 과제입니다.

 

자기의 옛집으로 돌아가려면 우선 한문(漢文)을 알아서 민족의 전통을 확인하는 것이 첫작업이 될 것입니다. 한국사는 목표가 뚜렷한 근원을 향해서 돌아가는 '민족사의 르네상스'가 일어나야 합니다. 만약 그리스와 로마의 영광과 위대함이 없었고 이를 기술한 고전(古典)이 없었더라면, 인류역사상 저 'Renaissance'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본래 이 말의 어원은 '옛 정통(근본)으로 돌아간다'는 그리스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따라서 되돌아갈 고향의 영광과 위대한 추억이 없는 민족, 향수가 없는 민족에겐 르네상스란 말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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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mars의 진실 찾아 떠나는 세상
글쓴이 : 화성인 mar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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